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허지원
■작가도 눈병에 걸린다
문학은 영양 가득 식사일 수도
멋진 요리일 수도 있지만
즉효 있는 약은 아닐 수 있어
이 책은 서랍 속 상비약처럼
눈병 걸린 사람에겐 ‘안약’
정기적으로 머리를 하러 찾아가는 디자이너가 있다. 최근 방문해 머리를 자르고 뿌리염색을 하던 중에 디자이너가 내게 물었다. “만약 지금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고객님은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아요?”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다음 직업으로 떠올려 본 일은 있다고 대답했다. “심리상담을 공부해서 상담가로 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순간 디자이너의 얼굴에 깜짝 놀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잘 어울리는데요?” 그러고 나서 그가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가족 상담을 받았는데, 상담을 받고 많이 좋아졌어요.”
디자이너의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우리 또래에 부모와 가족 상담을 받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가족이든 문제가 있지만 가족이 다 함께 상담을 받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인식의 면에서도 그렇고, 비용도 그렇고.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고, 그도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나는 심리상담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임상심리전문가 허지원 교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팟캐스트를 들으며 느꼈던 호감과 존경심이,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고양되던 것이 떠올랐다.
허지원 교수는 예스24가 제작한 <책읽아웃>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저서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의 내용을 소개했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신선하고 놀라웠으며 뭐랄까, 참 시원했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분야에 몰두해온 이가 풀어내는 그 세계의 이야기를 접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연구 결과가 일반 대중에게 ‘실제로’ 도움을 준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있을까.
최근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드디어 책으로 읽었다. 팟캐스트를 들은 지 1년 만이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때 인상적으로 들었던 내용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와 같은 말들.
책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대해 뇌과학자와 임상심리학자가 각자 상담을 해주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두 분야 모두에서 활발히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저자의 특성이 반영된 구성이다. 예를 들어 애정결핍을 호소하는 내담자의 사례가 등장하면, 뇌과학자와 심리학자가 자기 분야의 연구 성과와 접근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인간의 사고와 정서에 관여하는 뇌의 각 영역들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뇌과학자의 이야기는 우리를 어느 정도 ‘리얼리스트’로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객관적일지언정 결코 차갑지 않다. 실용적이면서도 뜻밖에 따뜻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내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에 에너지를 돌릴 수 있도록 저자는 구체적인 팁을 제시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함부로 라벨링하지 말고, 허황된 낙관 대신에 무거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말하는 이 책의 태도가 나는 참 좋았다.
문학과 심리상담이라는 두 분야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내게 무척 흥미로운 주제다. 나는 심리상담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로 분류될 만한 책들도 좋아한다. 이런 책도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읽는 게 아니고 절실한 마음으로 읽는다. 어릴 때부터 세계문학을 즐겨 읽었고 각 시대와 지역에 존재했던 인간성의 여러 면모를 두루 대리경험한 것 같지만, 당장 내 일상의 덤불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작은 칼 하나가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 그럴까. 문학은 증상이지 처방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증상 그 자체에 매혹되는 사람들이다. 문학의 관심은 의미심장한 증상을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있다. 문학은 심지어 ‘진단’조차 아니다! 그저 ‘증상’일 뿐이다. 가령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문학은 영양 가득한 식사일 수 있고 때로는 멋진 요리일 수도 있지만, 즉효가 있는 약은 아닐 수 있다. 눈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당장 꼭 맞는 안약 한 병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도 눈병에 걸린다. 손이 잘 닿는 서랍에 보관해 놓은 상비약처럼, 나는 두고두고 이 책을 펼쳐보게 될 것 같다.
<김세희 작가>
■나 자신을 안다
내 일상 덮친 ‘코로나 블루’
내가 나를 안은 채 ‘괜찮다’
그 행위로도 위로되어 신기
나 자신을 달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아닐까
나는 표현 욕구가 많다. 양적인 측면에서도, 질(?)적인 측면에서도 남들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내 감정을 알리는 편이다. 특히나 갈등이 빚어졌을 때 이런 내 표현 욕구가 빛을 발하는데 일반적으로 부당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평소보다 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편이고, 내 의사 표명을 확실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 주변의 내향형 친구들은 이런 나의 갈등 해결 방식을 보며 자주 부럽다고 말한다. “너는 정말 화를 제대로 잘 내는 것 같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화를 잘 낸다. 친구들은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최대한 갈등을 피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말을 버벅대거나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가 다반사라 화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후회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너처럼 그때그때 할 말을 다 하면 후회가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않다. 나는 할 말을 다 하고도, 심지어 백번 돌이켜 봐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을 해놓고도 지독히 후회하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매번 좌절하며 생각한다. 이 많은 화는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얼마 전 이런 나의 성정을 부러워하곤 하는 친구 김세희가 나에게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라는 책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가족과 뒤엉켜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화는 표출할수록 더욱 커집니다. 카타르시스는 타인의 이야기를 관찰할 때에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식의 정리되지 못한 감정 표현은 불쾌감과 죄책감을 더 높일 뿐입니다.” 이 구절을 읽은 나는 떠나가라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나도 나를 보고 쓴 것 같은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여러 만성질환을 앓아왔다. 특히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독히 괴롭힌 병은 양극성장애, 즉 조울증이었다. 의사는 병의 요인으로 유전적 특질과 더불어 영·유아기에 무관심하고 적절하지 못한 태도를 보인 양육자의 태도를 꼽았다. 나는 나를 방치한 부모님을 몹시 원망했고 그날 이후로 쭉 분노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더불어 스무살 때부터 내가 겪는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끊임없이 병행하고 있지만 서른 몇 살이 된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혀오고 있다.
얼마 전 주치의의 권유로 오랫동안 중단했던 상담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코로나 블루’가 나를 덮쳐왔다. 올해 초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는 책을 낼 정도로 만성적인 야간성식이증후군에 시달려왔던 나는 그나마 주기적인 운동으로 간신히 건강을 지켜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헬스장이 문을 닫아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을 쓰는 작업을 하던 카페까지도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한번 잃어버린 리듬을 되찾지 못해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고,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별수 없이 주치의의 권고대로 다시 상담을 시작했다.
여러 번 상담을 거치며, 지난 십 몇 년 동안 다 해결했다고 믿었던 마음의 앙금들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났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마음의 부침에 상담자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쯤 이런 감정기복으로부터, 화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냐고. 상담자는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지요.” 알고 있던 대답이었지만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의 말미에 쓰인 구절을 다시 한번 읽었다. “부모는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 있는 대상이 나를, 아니면 나 스스로가 나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마음을 평안으로 이끄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저자는 양팔로 자신을 안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버터플라이 허그’를 효과적인 안정의 수단으로 제시한다. 자신이 자신을 안은 채로 끊임없이 괜찮다고 되뇌어주는 것, 어쩌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그 행위로도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나의 분노와 공허를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안고, 나를 토닥이며, 이 시기를 버텨 나가볼 생각이다.
<박상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