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박상영의 우리 뭐볼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 전홍진

Magazine X 2020. 9. 4. 13:43

■예민함이라는 가능성

작은일도 별일 아닌 것으로
쉽게 넘기지 못하는 성격
장점으로 승화시키면
더욱 탁월한 자질로 발현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얼마 전 한 잡지에서 짧은 글을 청탁받았다. 창간 33주년 기념 특집으로 다양한 ‘33세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며 1987년생인 내게 33세란 어떤 의미인지 써달라고 했다. 나는 고민하다 이제야 조금씩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나이 같다고 썼다.

 

돌아보면 나는 직장인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가, 다시 말해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어떤 상황을 두려워하는가, 삶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등을 어렴풋이 의식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제야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취직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릴 때는 그 밖의 생각들이 사치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글을 쓰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했다. 소설을 통해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을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무척 실망스러운 몇 편의 글을 완성한 뒤 깨달은 것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그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어떤 것인지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성향을 분명하게 파악하게 된 것은 불과 1~2년 전의 일이다. 예를 들어 나는 불안지수가 높은 사람이구나, 나는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힘들어 하는구나, 불편한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등등. 심리학 책을 읽으며 이런 성향을 자각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고통이 줄어들었다.

 

전홍진 교수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은 이런 성향들을 묶어 ‘예민함’이라고 칭한다. ‘매우 예민한 사람’은 “작은 일에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쉽게 예민해지고 별것 아닌 일로 넘기지 못하는 분들”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10여년간의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각종 사례들이 실려 있다. 비행기 탑승 공포증이나 건강염려증부터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경우, 기억 상실증, 코로나 블루까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성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인 듯하다. 예민함을 ‘결점’으로 볼 것인가. 저자는 머리말에서 “사회에서 성공하거나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이들도 많이 만났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다수가 ‘매우 예민한 사람들’이었다”고 밝힌다. 예민함을 관리해서 성공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부정적인 쪽으로 발현되지 않게 주의한다면, 예민함은 오히려 탁월한 자질과 연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인터뷰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민한 성향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니까, 스스로 예민하다는 걸 알고 앞으로 어떻게 예민함을 관리해 나갈 건지가 중요해요.”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마음속 한 부분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게 저 문장은 이렇게 들렸다.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당신 자체를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성향은 ‘다름’일 뿐이지 선악이나 우열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나의 예민함 자체를 ‘나쁘다’라고 여기는 함정에 빠진다. 사람의 성향을 ‘바람직한’ ‘덜 바람직한’ 것으로 구분하고 나의 예민함을 덜 바람직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예민함을 숨기려 하게 된다. 불편할 때도 아닌 척, 유쾌하고 대범한 척. 가령 어떤 상황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유사한 상황을 피하려고 하면 되는데, 왜 불편하다고 느끼는지 반성하고 자책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할 때가 많다. 

 

결국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인지했지만, 그걸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언제나 나 자신을 ‘개선되어야 할 상태’로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피곤했다.

 

전홍진 교수는 매우 예민한 이들의 ‘문제’보다는 ‘가능성’을 본다. 꼼꼼하고 세심한 기질을 능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말하며 ‘업그레이드’에 무게를 싣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극복’은 ‘교정’과는 거리가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도움을 받아, 이번에야말로 나 자신을 좀먹는 내면의 ‘바람직한 인간상’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을 때 대신 이렇게 말해보기로 했다. 나는 섬세한 사람이다. 나는 많은 걸 느끼는 능력이 있다. 나는 고성능 카메라다. 민감한 악기다….

 

■이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예민의 농도 높이는 지금
사회적 억압이 더 커질
미래 세대의 삶 두려워
이 시련, 발전의 계기 되길

 

트라우마, 라는 단어는 사실 매우 학술적인 용어이지만 이제는 널리 대중화되어 마치 보통명사가 된 것만 같다. 옆집에 사는 성격이 복잡하고 유달리 어두운 낯빛의 어떤 아이 같은 느낌. 이 때문에 나는 트라우마, 라는 단어를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 편인데 너무 간편하게 너무 많은 상황을 일갈해버리는 손쉬운 단어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몇 가지 근원적인 핵심 기억은 모두 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있다. 나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며, 내 유튜브 구독 목록은 강아지와 고양이와 관련된 채널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선 강아지를 보면 딱딱하게 몸이 굳고 공포심에 사로잡히고는 하며 심지어는 동행인의 뒤에 숨어 강아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까지 한다. 100㎏에 육박하는 덩치를 가진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인생 첫 번째 강아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하곤 했던 제주가든 앞에 묶여 있던 흰둥이. 여섯 살의 나는 흰둥이가 낳은 다섯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를 만지고 있었다. 솜뭉치처럼 자그맣고 귀여운 새끼 강아지의 질감을 느끼던 도중 내게 다가온 흰둥이가 순식간에 내 손을 물었다. 손등에 피가 맺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울었다. 엄마,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언제나처럼 별일 아니니 얼른 눈물을 그치라고 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기분이나 통증에는 예민하고 자식의 고통에는 불감한 측면이 있었다. 나는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맺힌 손을 내버려둔 채 눈물을 그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른 몇 살이 된 지금, 나는 개를 사랑하는 동시에 개가 다가오는 것을 무서워하며, 내 진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어른으로 자랐다. 

 

프리랜서 저술업자인지라 남들에 비해 사람 만날 일이 적은 편인데,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 격상의 영향으로 타인과 마주할 일이 더 줄어들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 화면을 통해서만 타인을 접하니 이상하게 자꾸만 더 예민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심지어 이제는 옆집과 윗집에서 사용하는 가전이 내는 소음의 종류조차 알아맞힐 지경이 되었다. 정수기가 제빙을 하는 소리와 마사지건이 내는 진동 같은 것들. 이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개미의 청력을 가졌다며, “너처럼 예민한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귀가 밝은 거다, 정도의 말을 하며 손사래를 치고는 했다. 그러나 돌아서 생각해보면 나는 예민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이를테면 “생긴 것에 비해 섬세하시네요”와 같은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부정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성균관대 의대에서 오랫동안 우울증과 예민성의 관계를 연구해온 전홍진 교수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에는 한국 사람들이 ‘예민한 경우’가 많으며, 이런 예민성은 선천적인 기질과 생에 겪었던 여러 트라우마를 억압해온 게 원인이 된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의 실체를 알지 못하다 (혹은 자신의 내적 예민성을 자각하지 못하다) 지독한 병증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이러한 구절들을 읽으며 나는 마치 내 민낯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함께 읽고 난 후, 세희와 메신저를 통해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도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린아이가 혹시 마스크를 답답해하지 않냐고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꾸 벗으려 해서 계속 씌워놓느라 진땀을 뺀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아이가 재채기를 하는 것조차도 두렵거나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자꾸만 마음이 아득해졌다.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타인과 살을 비비며 살아갈 수 없고,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멀리하면서 애써 예민의 농도를 올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 나아가 이 모든 변화들이 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이 사회가 점점 더 예민하고 억압되고 슬픈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답답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이 든다. 모쪼록 지금의 이 시련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길이기를 바라 본다.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