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X 2020. 7. 10. 10:36

 

■우리가 알던 ‘가족’이 아니야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지켜보고 응원하는 가족
한국문학에서 보기 어려운 모델
진지하면서도 건강한 문학이다

 

대학 4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하와이 대학에 머물렀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가장 이국적이라는 이유로) 길고 긴 외국 대학 목록에서 나는 하와이 대학을 골라 지원했고, 나를 포함해 열 명가량의 학생이 선발되었다. 학번도 다르고 과도 각각이던 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느슨한 대가족 비슷한 것이 되었다. 캠퍼스 안에 있는 외부인용 기숙사에서 묵으며 같이 밥을 먹었고, 모든 수업을 함께 들었다. 수업은 오전에만 있었고, 점심을 먹은 뒤로는 자유였다. 초반에는 큰 덩어리로 함께 움직였지만 점차 성향과 관심사에 따라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오아후 곳곳을 탐색했다.

 

5년 뒤, 나는 와이키키에서 서핑을 하다 떠밀려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을 썼고 그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지금껏 발표한 소설 여러 곳에 그때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걸 보면, 하와이에서 머문 경험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그래서 최근 출간된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는 기쁨이 어느 때보다 컸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가족들이 하와이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내용이다. 심시선 여사가 하와이에서 젊은 날을 보냈기 때문이고,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가 그린 심시선의 문제적인(?) 초상화가 호놀룰루 미술관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와이에 도착한 가족들은 각자 기일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한다.

 

소설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행을 ‘편애 없이’ 담아낸다. 심시선의 성씨 다른 4남매뿐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 자녀들의 시선으로 본 세상까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와이키키 해변, 비숍 미술관, 노스쇼어 등 반가운 지명들을 배경으로 한 작은 모험들을 따라가며, 그 장소에 나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수처럼 겁 없이 현지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던 친구도 있었고, 아홉 시간 동안을 날아와 놓고 화수처럼 밀린 잠만 자던 친구도 있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고, 매일 저녁 해변에 나가 선셋을 감상하는 아이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 뒤 하와이에서 ‘겟’한 아이템을 하나씩 들고 모이자고 했는데 나는 애석하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아이템들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고,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열 명의 친구들은 그때 하와이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되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정세랑표’ 플롯이 새삼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종합병원을 무대로 무려 50인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던 전작 <피프티피플>이 그렇듯, 한 조각 한 조각을 나란히 놓아 어느덧 큰 그림을 완성하는 정세랑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읽을 때마다 경이롭다.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든 소설에는 작가가 말한 것이 있고,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작가의 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심시선은 ‘완벽한 여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매력적이고 시대를 앞서갔던 예술가다.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모두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위엄 있는 어른. 서로 신뢰하는, 그러나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지켜보고 응원하는 가족. 이는 그 자체로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가족 모델이 아닐까. 정세랑은 내게 진지하면서도 건강한 문학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가다.

 

이 소설에는 기억에 남는 디테일이 가득한데, 그중에서도 규림의 별명이 ‘고향만두’라는 대목을 읽으며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게 별명이 될 수 있냐고 항의하는 규림에게 친구는 말한다. “고향만두 이후로 냉동만두의 진화는 여러 차례 있었어. 그런데도 넌 고향만두에 완전히 만족하잖아? 쉽게 만족하는 성격인 거야. 초콜릿도 가나 초콜릿을 질리지도 않고 먹고. 국어 시간에 배운 대로 안분지족.”

 

고향만두나 가나 초콜릿을 즐겨 먹는 것이 한 인간의 핵심을 보여준다니. 어떤 유형의 성격 검사를 했을 때보다 더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이 소설에서 자신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이 모계 가족의 개성적인 여성들 대신, 억울하지만 규림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내게도 이런 어른이 있었다면

후손들이 고인의 뜻을 거스르고
하와이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
내게도…나의 삶도…
읽는 내내 쓸쓸한 가정을 해본다

 

내가 어른들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적부터 나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산자락에 걸린 구름도, 아스팔트에 말라붙어 있는 잠자리도, 맨홀 뚜껑에 쓰여진 글자도 내게는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부모님은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내 질문을 때때로 성실하게 대답해주었으나, 대개는 조금 성가시게 여겼다. 누군가의 진심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히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들의 그런 태도를 나는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 아빠는 내 질문에 일관적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생겼을 때 사전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타인과의 관계나 소통보다는 책이나 영상물 같은 ‘물질’의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이.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궁금했고,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기에 부모님의 세계는 턱없이 좁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 쓴 나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아빠가, 엄마가 교수님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대답해줄 수 있을 텐데.’

 

친구 중 누군가의 부모님이 교수인 것을 보고, 그가 남다른 상식력(?)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질투 섞인 부러움에 적은 구절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세계에 모종의 실망을 품고 있는 열 살짜리 아이다운,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웃기기보다는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고는 한다.

 

열 살의 어느 날, 할머니의 환갑잔치가 우리집에서 열린다고 했던 날을 기억한다. 할머니댁도, 부산의 큰아버지댁도 아니고, 호텔도, 식당도 아닌 우리집에서 환갑잔치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아빠에게 그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라고 짧게 일갈했다.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나의 질문은 묵살되었고,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엄마는 다니던 회사에 연차를 내고 홀로 할머니의 생일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빠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그것은 별로 새로운 풍경은 아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가 부엌에 발을 들인 일은 없었다. 할머니의 생일 전날, 양손 가득 장을 봐오던 엄마는 빙판길에 넘어졌고, 인대가 늘어난 발목에 보호대를 찬 채 전을 부치고 잡채를 무쳤다. 결국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많은 음식들이 상에 올라온 채 할머니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친척들이 무람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던 와중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영애님만 생각하면 난 눈물이 난다.”

잔치는 눈물바다로 끝났고, 할머니는 끝내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잔치가 끝난 뒤 나는 사전을 펼쳐 ‘영애’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장남인 큰아버지댁에 사정이 생겨 차남인 우리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맡게 되었다. 그 선택에 당연히 엄마의 뜻은 반영되지 않았고, 아빠의 일방적 합의로 정해진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아직도 환갑잔치 때 다친 발목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이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아빠는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부모님 제사를 왜 엄마가 지내야 해?” 아빠가 벽으로 리모컨을 던졌을 때, 산산조각 난 잔해며 바닥을 구르던 건전지의 풍경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결국 이후로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나와 엄마가 함께 전을 부치고 과일을 깎고, 설거지를 했다. 아빠는 우리집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이 모인다는 점에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빠에게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점점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엔 내가 죽어도 절대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당시로선 파격적 주문을 했던 어른 ‘심시선’이 등장한다. 그녀가 죽은 후 후손들이 고인의 뜻을 거스르고 하와이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게 소설의 주된 내러티브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심시선이라는 어른이 있었으면, 나의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불편하고도 쓸쓸한 가정을.

 

어느덧 부모님도 환갑이 넘으셨고 나 역시 이제는 아이가 아닌 부모가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집이 아닌 사촌형(즉 큰아버지의 아들)의 집에서 제사를 치르고 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오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