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늘

‘수국’ 피는 계절에 오길 잘했다

영산강 연작. 2020. 김지연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집을 둘러보고 나왔다. 집과 길은 그대로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땅의 지평이 달라보였다. 옛날의 집은 더 높았던 것 같고 평야는 더 넓었던 것 같았다. 반대로 길은 더 좁아 보이고 산은 더 낮아보였다. 사람은 살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빈집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집주인은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데 이곳은 물건을 저장하는 곳으로 쓰인다고 했다. 같이 간 고향친구는 굳이 주인을 찾아 인사를 시켜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 뒤로 혼자서 다시 찾아갔다. 여전히 주인은 만날 수 없었고 옛집은 처음에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시름을 보여주었다. 헝클어진 마루와 문짝들, 뒤란의 부서져 내린 시렁은 쇠락의 느낌을 더했다. 돌아오는 길에 언덕에 올라섰다. 어린 시절 다니던 길은 언덕과 방죽이 있어 무섭고 싫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내 삶 속에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기 때문에 이곳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슬픔을 품은 곳이 되었다.

 

어두운 밤이면 도깨비가 나온다던 작은 저수지는 흙으로 메워지고 그 자리에 비닐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봉분이 무너진 묘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사이에 탐스러운 수국 한 무더기가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 뒤로 멀리 영산강이 보이고 ‘송정’ 쪽의 새로 짓는 아파트가 아스라이 가물거렸다. 수국이 피는 계절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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