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작은 아씨들> 삽화. Lapham’s Quarterly 홈페이지
집 앞 구립도서관에는 아이와 마음 편히 책을 볼 수 있는 유아자료실이 있다. 알록달록한 동물 소파가 있고 약간의 소음이 허용되는 곳이라 매일 오후에 들러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코로나19가 퍼져나가던 어느 날, 입구에 책상과 의자가 나와 있었다. 직원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키며 방문객의 열을 체크하고 손을 소독하게 했다. 이후 열람실 안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는 등 규정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더니, 결국 지난달 24일 임시 휴관에 들어간다는 문자가 왔다.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공간이 폐쇄된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큰 타격이 돼 마음을 위축시켰다.
카페에서 얼굴 절반을 마스크로 가린 채 앉아 <작은 아씨들>을 읽었다. 헤아려 보니 20년 만이었다. 그레타 거윅의 리메이크 영화 제작이 어린 시절 사랑하던 고전소설을 다시 읽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성인이 되어 만난 <작은 아씨들>은 기억보다 훨씬 교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억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1868년에 발표된 1부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 아버지를 전장에 보낸 한 가족의 1년을 다룬다. 개성이 뚜렷한 네 자매와 이웃집 소년 로리가 함께하는 ‘생활’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자매들은 끊임없이 결심한다. 더 착해지겠다고, 부지런히 일하겠다고, 불평하지 않겠다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겠다고. 하지만 결심은 얼마 못 가 느슨해지기 마련이고, 새로운 시련이 닥치면 자매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얼마나 따뜻한 햇볕 속에서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그 절정에서 셋째 베스가 성홍열에 걸린다. 어머니가 아버지 간호를 위해 멀리 떠난 뒤 한동안 지극히 절제하고 선행을 베풀던 자매들은 다시 게으름을 부리기 시작하지만 베스는 묵묵히 가난한 이웃 가족을 돌본다. 그러다 그 집 아이들에게 감염된 것이다. 베스가 고비를 맞던 밤, 두 언니 메그와 조는 병상을 지키며 말한다. 베스만 살아난다면 두 번 다시 불평하지 않겠어. 평생 그분(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겠어.
이 대화를 보며 얼마 전 남편에게 “코로나19 사태만 끝나면 감사하며 살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남편은 내가 예전에도 그런 말을 했음을 상기시켰다. 맞다. 입덧이 심해 종일 토하고 누워 있던 때는 “이것만 끝나면”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다음엔 이사와 출산이었고 말이다. 끝이 오리라 믿어지지 않던 일들도 결국 지나갔고 잊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태만 종료되면,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까?
세계 전역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생존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들린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라는 근본 원인을 직시하지 않고 지금처럼 발전과 소비 중심의 제도와 생활을 이어가는 이상, 코로나19는 종식된다 해도 신종 병원체들이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길 원해야 할까? 지금 우리가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일상’이 바로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그런 점에서 감염 우려 때문에 카페 안에서 음료를 마셔도 일회용컵에 담아주는 상황은 얄궂다 못해 참담하다).
덧붙이자면 어린 시절 네 자매 중 나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인물은 소설을 쓰는 조가 아니라 조의 원고를 불태운 에이미였다. 막내인 데다 응석받이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비슷해서였다. 베스가 성홍열에 걸리자 에이미는 감염을 우려해 대고모 집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엄격하고 까다로운 대고모 아래서 종일 가사노동과 공부를 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대고모는 훈련을 이겨낸 에이미에게 푸른색 터키옥 반지를 선물로 주고, 에이미는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걸 끼고 다니기로 마음먹는다. 엄마가 이유를 묻자 에이미는 답한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결심은 잊기 쉽다고. 그러니 자신을 깨우쳐줄 만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결심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건 탓할 일도, 상심할 일도 아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하지만 루이자 메이 올컷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네 자매를 그럼에도 다시 결심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들로 그려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일상생활의 노력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보며 묻게 된다. 어떻게 해야 코로나19 사태 한복판에서 지금 느끼는 위기의식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일상을 회복하되 그것이 되돌아감, 나쁜 반복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으로 뭉친 자매도, 신실한 이웃도 없는 우리에게 ‘에이미의 작은 푸른색 반지’가 되어줄 만한 것은 무엇일까.
<김세희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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