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늘

아버지와 함박꽃

아버지와 함박꽃 연작. 2020. 김유리

남도사람들은 유난히 함박꽃을 좋아한다. 옛날 시골 화단이랄 것도 없는 곳에 아무렇게나 심어두면 함박웃음처럼 환하고 소담한 크기로 어우러져 피는 꽃, 집 안 사람들이 특별히 눈길 주지 않아도 저 혼자 꽃이 되어 밝게 웃음 짓는다.

김유리는 아흔 살의 홀로 되신 아버지, 혼자서는 씻는 일도 못하니 대소변도 불편할 수밖에 없고, 생각의 질서도 잃어버린 아버지를 사진에 담았다. 꾸밈없고 담백한 사진이 우리들의 늙은 부모님을 생각하게 해서 애잔함과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김유리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어쩌면 그보다 더 잔인한 제주 4·3, 여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7세에 형이 총살당하고 아버지가 고문의 후유증과 화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소년가장이 되었다. 모진 세월의 가난과 고통을 이겨낸 그 시대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이제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 세상을 뜬 부인이 병실에 있을 때 ‘사랑하는 부인에게, 평생을 두고 잘못한 것을 글로 적어 올립니다. 나는 천치 바보였습니다… 이해가 넓으며 고마운 사람’이라는 편지를 남겼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사는 동안에 아내에게 한이 맺히게 한 일들에 대하여 삐뚤빼뚤한 손글씨를 적어 나갔다. 구순의 남편이 일생을 동고동락한 아내에게 보낸 고백서 같은 것이리라

 

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곱게 가꾸어놓고 간 꽃밭에 함박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늙은 아버지는 무심히 그 꽃밭 앞에 앉기를 좋아하신다. 막내 딸 김유리는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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