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박상영의 우리 뭐볼까?

영화 <안경>

영화 <안경>의 한 장면.

 

■ 버리기, 채우기

 

짐이 필요없다는 듯이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우고
원하는 것만으로 사는 이들
진정한 미니멀리즘이란
인테리어가 아닌 삶의 방식

 

 

내게 여름휴가는 ‘어린이집 여름방학’과 같은 말이다. 아직 어려서 갈 수 있는 곳이 적은 데다 코로나19와 장마까지 겹쳤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린 습하고 끈적끈적한 방학이 마침내 끝나고 아이를 등원시킨 월요일, 휴가 같은 영화가 간절했다. 몇 년째 봐야지 생각만 하던 <안경>을 보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경>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작품으로, 대표작 <카모메 식당>과 함께 ‘힐링 영화’로 자주 언급된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시원하게 하는 작은 섬의 풍경이 오프닝부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주인공 ‘다에코’가 혼자 공항에 내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에코는 사람 하나 없는 바닷가를 지나 예약해둔 숙소를 찾는다. 영화에서 처음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민박집 주인 ‘유지’가 보자기를 펼치는 동작이었다. 저녁식사로 나무찬합에 도시락을 싼 다음 옆에 접어둔 보자기를 들어서 펼치는데, 빠르면서도 반듯한 그 손놀림이 인상적이었다. 혼자서 낯선 곳에 여행을 갔는데 숙소 주인이 이런 사람이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밝혀지듯, 이곳에는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일단 유지와 함께 민박집을 관리하는 중년 여성 ‘사쿠라’의 존재가 그렇다. 사쿠라는 봄마다 섬에 와서 빙수를 판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인 인물이다. 유지와 사쿠라는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으나 찰떡같이 마음이 맞는 사이로 보인다. 그들은 아침마다 해변에서 기이한 체조를 하고, 주인공에게 사색을 권유한다.

 

주인공은 나머지 숙소를 옮기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문제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두 번째로 찾아간 숙소에서 뛰쳐나와 길을 헤매던 주인공은 자전거를 탄 사쿠라를 만난다. 지친 주인공이 뒷자리에 타려고 캐리어를 잡아 끌자 사쿠라는 단호한 거부의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주인공이 캐리어를 포기하자 사쿠라가 환히 웃는 것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짐은 필요 없다’는 것이 이 숙박집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캐리어를 (기꺼이) 길바닥에 버린 채 손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탄다.

 

그래도 그렇지. 그럼 다음날 아침 주인공이 입은 옷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짐을 버려라’로구나 생각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이 묵는 방은 미니멀리즘 잡지 속 화보 같았다. 깔끔한 침구와 작은 테이블 외에는 가구도 장식품도 전혀 없다. 내게는 ‘취향 저격’인 숙소다. 유명한 정리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몹시 흥분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곤도 마리에는 정리에 앞서 물건 최소화하기, 즉 ‘버리기’를 강력 주장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나의 경우 버리기는 쉬웠다. 이미 이사 때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옷이 이게 다인가요?”라는 말을 듣는 살림이었다. 문제는 남길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리를 하면서 내게는 설레는 물건, 소중한 물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잔한 충격이었다. 곤도 마리에는 말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말해준다고. 그때그때 적당히 구입한 취향 없는 물건들을 보면서, 나는 가릴 수 없는 내 삶의 빈약함, 누추함과 마주했다. 

 

그러니까 진짜 질문은 “어떻게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짜 좋아하는 것들, 내게 꼭 맞는 멋진 물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취향과 안목, 그리고 경제력이 필요하다. 미니멀리즘이란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자신을 가꾸고 다듬어가는 일이고, 그렇기에 결코 단번에 완성할 수 없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볼 때 사쿠라와 유지는 삶의 방식을 완성한 사람들이다. 인생에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싹 치우고, 원하는 요소들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사쿠라는 거의 ‘선’의 경지에 이른 듯한 인물이다. 존경스럽다. 하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이 생긴다. 미니멀리즘과 비슷하다. 이런 삶의 방식이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는 않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점점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벗어나 ‘휴가 이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삶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무엇과 더불어 내 인생을 보낼 것인가? 어쩌면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휴가지에서 해보기 좋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김세희 작가

 

■ 휴가가 필요해

 

코로나19로 날려버린
미국·방콕행 비행기 티켓
지독한 장마 속 일상에
재충전의 여백을 선사한
대학 시절 추억의 영화

 

 

작년까지 나는 직장생활과 작가생활을 겸업했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상사의 눈을 피해 저가항공사 사이트를 드나들고는 했다. 저가항공사의 특성상 자주 할인 행사가 열렸고, 기약 없이 먼 일정의 항공 티켓을 예약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고는 했다.

 

작년 초, 퇴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던 나는 다가올 2020년을 기약하며 총 세 개의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놓았다. 하나는 미국행, 나머지 두 개는 태국행 티켓이었다.

 

일단 미국이라는 나라는 내게는 조금 각별한 편이다. 20살 때 난생처음 밟아본 외국 땅이 바로 미국이었으며, 언어공부를 빙자해 그곳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체류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나는 공공연하게 미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르고는 했다(물론 고향의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 방문은 내게는 몹시 특별하게만 느껴졌는데 미국의 한 유명(!) 대학에서 내 소설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려, 강연자로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일개 팔푼이 고학생이었던 내가, 미국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간다니.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고, 진심으로 감격했다. 심지어 항공료와 숙박비 일체가 지원되기까지 하니 행복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물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 지구를 휩쓴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내 비행기 티켓과 강연이 모두 취소되었고, 나는 피눈물을 쏟고 싶은 기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가항공사에서 파격적인 가격으로 구매해 친구들에게 흐드러지게 자랑까지 했던 방콕행 티켓 2장 역시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얼마 전 8월 마지막 날(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생일날) 출발하는 티켓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난 후에 난 절망했다. 허탈한 기분을 안고 인스타그램을 켜서 지난 방콕 여행의 추억을 돌이켜보았다.

 

마지막으로 방콕에 갔던 시기는 재작년.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을 하는, 절친한 소설가 S와 함께였다.

 

여행은 언제나처럼 ‘특가’라는 두 글자로 말미암아 시작됐다. 나는 방콕 왕복 티켓을 12만원에 충동적으로 구매했고, 뒤늦게 함께 여행을 갈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단행본 출간 작업을 위해, 실은 서울살이에 지독한 환멸을 안고 강원도로 떠난 S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나는 호텔비를 일체 내주겠다는 조건으로 S를 설득했다. 그렇게 방콕에서 마주친 우리는 무려 10개월 만에 서로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웃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짐을 풀어놓기 무섭게 호텔의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잠시 책을 읽다 말고 S가 내게 물었다.

 

“이제 뭐 해?”

“그냥 이러고 있는 거야.”

“이게 다야? 고작 이거 하려고 방콕에 온다고?”

“있어보면 알아.”

그리고 정확히 닷새 뒤, S는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메아리처럼 남긴 채 방콕을 떠났다.

 

이렇듯 내게는 각별한 여행지로의 회귀를 모두 놓쳐버린 2020년 8월의 어느 날, 지독한 장마가 계속됐고,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업무가 매일 나를 덮쳐왔다. 그야말로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일상에 아주 작은 돌파구라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어두운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돌려보면서 하품을 하던 중, 문득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봤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가 떠올라 오랜만에 전작을 꺼내보게 되었다. 나에게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는 휴가와 동의어이다. 영화 &lt;안경&gt;은 널찍하고 한적한 바다를 배경으로 별다른 사건도 대단한 갈등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직접 담근 우메보시와 역시나 직접 삶은 팥으로 만든 팥빙수, 때가 되면 해변에 모여 요상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엉뚱하지만 여백으로 가득 찬, 필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의 풍경을 보는 내내 나는 방콕의 선베드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나른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휴가를 온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던 광화문의 예술영화관 스폰지하우스도 이제는 사라져버렸다. 마치 나의 지난 휴가계획이나, 안전하게 거리를 활보했던 자유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이 때문에 나는 노트북의 작은 화면 속에 담긴 <안경> 속 풍경을 보며 자꾸만 이런 말을 계속 되뇌게 되었다. 정말이지 나에겐 휴가가 필요해.

 

박상영 작가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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