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씨(29)는 직업군인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사회에 나왔다. 그때 그의 통장에 모인 돈은 총 2500만원. 그는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5000만원을 만들어 장사를 할 계획이었다. 음식 장사. 그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관공과 한 팀을 이뤄 전국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는 용접공이었고, 어머니는 바로 아래 여동생이 차린 추어탕 집에서 홀과 주방을 오가며 일했다. 위로는 네 살 터울의 누나가 한 명 있었고, 외할머니가 그들 남매를 돌봐주는 날이 많았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음식 솜씨가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혼자 힘으로 오이소박이나 마늘장아찌를 담기도 했다. 그가 기억하기로 좋았던 시절은 딱 거기까지였다.
숙련공으로 꽤 많은 일당을 받던 그의 아버지는 목포 조선소 파이프 연결공사에 들어갔다가 아르곤 가스에 질식돼 의식을 잃고 말았다. 빠르게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뇌 정지 상태. 그의 아버지는 그 상태 그대로 3개월을 버티다가 그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사망했다. 따로 소속된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위로금이나 보험금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장례를 치른 다음다음 날부터 다시 추어탕 집에 출근했고, 그의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담양에 위치한 한과 공장에 취업했다.
군 전역 후 그는 남원에서 가까운 광역시의 한 대기업 물류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상차 작업을 했는데, 4대 보험에 명절 상여금이 따로 나왔다.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일했고, 고시원비와 식비를 뺀 대부분의 월급을 저축했다. 퇴근하면 고시원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고, 따로 게임이나 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발 가위를 사서 직접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
자신의 식당을 개업하기 전, 마지막 1년 동안은 광역시 중심상권에 위치한 한 족발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홀 주문보다 배달 주문이 더 많은 곳이었는데, 가게 주인은 직접 족발을 삶지 않고 기성품을 사다 썼다. 그래도 그곳에서 밑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며 식당 돌아가는 분위기를 배울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들어간 식당이기도 했다고.
올해 초, 그는 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한 4년제 대학교 정문에서 가까운 4층짜리 건물 2층에 자신의 식당을 개업했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는 120만원, 따로 권리금은 없었다. 원래 피자와 스파게티를 팔던 곳이었는데, 프랜차이즈 피자에 밀려 장사가 잘 안됐다고 한다. 전 주인은 그에게 주방기기 일체를 무료로 넘겼다. 그래도 천장과 바닥 공사, 테이블과 의자, 간판을 교체하느라 2000만원에 가까운 돈이 들었다. 그는 그곳에 즉석 떡볶이집을 냈다. 추가로 주꾸미와 삼겹살, 차돌박이를 함께 주문할 수 있도록 메뉴를 짰다. 인테리어가 모두 끝나고 가게를 오픈하기 전, 그는 고시원에 있던 짐을 모두 뺐다. 가게에서 먹고 잘 생각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짐도 얼마 없었으니까, 교통비도 아낄 겸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올해 2월 중순에 가게를 오픈했다. 개강 시즌에 맞춰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정용이 들은 그의 사정의 전부였다. 가끔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과 소주를 사가던 청년. 피부색이 하얗고 말투가 좀 딱딱하던 남자. 그가 어젯밤 119구급대에 의해 가게에서 실려나가는 것을 정용이 목격했다. 때마침 와 있던 편의점 점주와 정용, 그리고 인근 가게 사장들이 도로에 나왔다. 영양실조래, 영양실조.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누나가 신고를 했대…. 그 누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던 게 손가락에 가위를 끼고 있더래…. 사람들은 구급차가 떠나간 뒤에도 계속 수군거렸다. 정용은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가만히 그의 가게를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그의 가게 간판. ‘生 즉석 떡볶이’ 그게 그의 가게 상호였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정용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