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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종교

내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친구가 교회에 나가 예쁜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나도 나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공부 안 하고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리고 다닌다며 질색을 하셨지만, 이런 종교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텅 빈 예배당의 찬 마룻바닥에 홀로 꿇어앉아 어떤 영적 신비감에 휩싸인 듯한 경험을 하고는 종교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도 깊게 박혔다.

 

학생부를 담당하는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고, 광주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다. 전도사님은 가끔 우리를 모아놓고 전 해인 1980년 광주의 일을 띄엄띄엄 들려주었다. 그는 이야기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가끔은 분통을 터뜨렸다. 십자가 앞에 홀로 앉아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곧 잘렸다. 교회는 그런 신심 깊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의 교회 체험은 곧 잊었고, 군대에 가서는 가톨릭을 접했다. 철학을 공부했으니 신학과 가까울 거라고 판단한 인사담당자 덕분에 군종성당에 배치를 받았다. 신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철학이 얼마나 분투했는지 알려주고 싶었지만, 나로서는 ‘꽃보직’을 받았으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군종병으로 복무하며 자연스레 입교를 하여 세례도 새로 받았다. 한국 남성으로서는 가장 불행하게도, 병사로 그리고 다시 군종장교로 두 번 군 복무를 하는 젊은 신부님과 매일 저녁 포도주를 마셨다. 미사 때 올리지 못한 포도주가 남아도는데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알량한 월급마저 몽땅 봉헌하는 신부님을 보며 감동도 받았다. 한편으로는 성당에 와서도 대접을 원하는 고위 장교들과, 장애인을 돌보는 어느 수녀원장을 보면서 씁쓸하기도 했다. 그 원장은 아무에게나 봉사를 요구했으며, 자신의 헌신과 청빈을 팔아서 인정(認定)의 재벌이 되기를 원하는 듯했다.

 

얼마 전 작고한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밥상에 함께 앉는 정신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느 전통사회나 밥상을 함께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었다고 한다. 하인이나 이방인이 밥상에 함께 앉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빵 부스러기를 구한 가나안 여인을 두 팔로 받아들였고, 오천 명의 어중이떠중이를 하나도 돌려보내지 않고 빵을 나누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제자들을 불러 한 식탁에 앉았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환대’라는 말로 우리들 인간의 존재 양식을 요약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한 목사가 동성애자들로 인해 바이러스가 확산되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또 한 번 불거진 한국 개신교의 타락상은 전광훈 같은 특정인물의 일탈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분리하고 차별하고 혐오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다진다. 진보정치를 빨갱이라며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하거나 차별금지법에 극력 반대하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신자가 줄고 있는 개신교계의 위기의식은 짐작이 가지만, 이런 정치행위나 외부의 적 만들기가 언제까지 통할지 모르겠다.

 

전광훈의 일탈이 개신교계 거의 전체와 정치권의 동조 또는 방관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보수개신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체면을 차리느라 나서지는 못해도 최소한 방관하거나 응원한 것을 알고 있다. 또 국민의힘 대변인은 전광훈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당내 인사 여럿이 그의 연단에 올라 가세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교회는 각성해야 한다. 어느새 교회는 보편적 사랑과 환대의 정신은 저버리고 차별과 혐오를 DNA로 삼아버렸다. 우리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방관하지 않았는가. 책임은 모두의 것이다.

 

<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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