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문지혁의 미니픽션

[미니픽션] 핏자국 남자가 카페 문을 연다. 여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관심한 척 하고는 있지만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안다. 그 역시 여자가 앉아있는 곳을 알고 있지만 카페 안을 여러 번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 가서 천천히 그녀 앞에 앉는다. “오래 기다렸어?” 여자는 반갑지만 웃지 않는다. 대신, “지금 몇 시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라고 쏘아붙인다. 남자는, “미안.” 이라고 짧게만 대답한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른다. “안되겠다.” 침묵을 깬 것은 여자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뭐?” “그만 두자고. 사람 말 못 알아들어? 헤어지잔 말야.”.. 더보기
[미니픽션] 7초만 더 OFF 잘 타지 않는 Q라인을 탄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이주일간 연락이 없던 그녀에게 어젯밤 텍스트가 온 것이다. See you tomorrow 6pm@Union Square 이모티콘 없는 짧은 문자는 갑작스러웠던 2주간의 공백만큼이나 낯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2주였던 것일까.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나는 빨리 아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오후 5시, 유니온 스퀘어로 가는 노란색 Q라인을 기다린다. ON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들고 있던 아이팟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모드는 랜덤 플레이. PLAY 0:01 지하철에 들어서자 정면에 앉아있던 흑인 사내.. 더보기
[단편소설] 스페이스맨 오늘 네이버 '오늘의 문학' 에 소개된 단편 .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단편을 싣고 싶었는데, 너무 세다는 이유로 커피믹스처럼 달달한 이 단편을 싣게 되었다. 올해 출간될 개인 단편집에 실릴 예정인 소설로,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591&path=|185|199|249|&leafId=302 더보기
[뉴욕 오딧세이3] Museums in New York  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K-Arts 9호에 실린 문지혁의 뉴욕 오디세이 3: Museums in New York. 메트로폴리탄에서, 구겐하임을 거쳐 뉴욕현대미술관(MoMA)으로 이어지는 한 남녀의 만남과 우연에 관한 짧은 이야기. http://webzine.karts.ac.kr/201101m/webzine.html# 더보기
[에세이] Happy, New, Year 오늘 맨해튼에 약속에 있어 나갔다가, 나간 김에 록펠러 센터에 들렀다. 42가 버스터미널에서 브라이언트 파크를 지나 다시 5번가를 따라 올라가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꼭 앞에까지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밀려 밀려 트리 앞 아이스 링크까지 가고 말았다. 이것도 기념이다 싶어 북적이는 사람들 머리 위로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으며 다가갔는데, 막상 맨 끝에 이르러 아이스링크를 내려다 본 순간 허무해지고 말았다. 텅 빈 아이스링크를 따라 말없이 돌고 있는 청소용 차량. 모두가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던 건 그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는 게 그렇다. 한참을 기대하고 기다리다가도 뚜껑을 열어보면 허무해지는 것. 뭔가 있겠지 하고 다가가지만 결국 마주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 삶이 전부 다 시시하고 재미없.. 더보기
[미니픽션] 12월 31일 “이 노래가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굿 나잇, 앤 해피 뉴 이어.”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재즈밴드의 리더가 말했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은 마지막 곡이란 말에 시선을 돌려 박수로 곡을 청했다.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에 갔던 그녀가 돌아오고 있었다. * 그날 밤, 맨해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 꼭대기의 재즈 바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밴드의 경쾌한 음악과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 그리고 마주 앉은 남녀 사이마다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유리로 둘러싸인 바에 앉은 이들의 체온을 얼마쯤씩 상승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나는 자꾸만 목이 탔다. 폐점시간은 이제 5분도 남지 않았다. 그 말은 2010년 역시 5분도 남지 않았다는 거였고, 말하자면 고백의 제한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 더보기
[미니픽션] 오랜 침묵 후에 1 그날 밤 우리는 소호 뒷골목의 어느 좁은 찻집에 앉아 있었다. 어두워질수록 탁해진 공기가 실내를 맴돌았다. 그녀는 조금 취한 듯 했고 나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군데군데 밝혀놓은 촛불에서는 향냄새가 났다. “괜찮아?” “…어.” 그녀의 목소리는 속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작고 희미했다. 나는 속이 탔다. 정확히 삼십칠 분 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탓이었다. 널 사랑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이야. 수십 번도 넘게 연습한 말은 오래 씹은 껌처럼 입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삼십 칠 분 동안 네 개의 술병을 비웠다. “볼펜 있어?” “응?” “펜 있냐구.” 뜬금없이 그녀는 펜을 찾았다. 가방을 뒤져 펜을 건네자 그 .. 더보기
[뉴욕 오딧세이2] Korean Writers in New York City 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연재 두 번째. 이번 기사 주제는 "Korean Writers in New York City" 뉴욕 속 한국 작가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webzine.karts.ac.kr/201011m/webzine.html 더보기
[미니픽션] KISS 부엌 뒤쪽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것은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젠장, 못 찾은 것보다도 못하게 됐군.” 중얼거리며 문을 열려는 순간 프랭크가 몸을 낮추며 나를 막았다. “이것 봐, 손잡이에만 먼지가 적게 쌓여 있어.” “그래서?” “최근까지 놈이 이곳을 드나들었단 얘기지. 곧 다시 말하자면……” “알겠어, 알겠으니까 쉽게 가자고.” 나는 문을 홱 열고 권총을 겨눈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갈수록 지하실 아래로부터 심한 나프탈렌 냄새가 올라왔다. “이봐,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아.” 코를 쥐었는지 맹한 목소리로 뒤쪽에서 프랭크가 말했다. “신중 또 신중 몰라? 상대는 연쇄 살인범이라고. 사우스 솔트레이크(South Saltlake) 시티가 생긴 이래 가장 흉악한……” 잔뜩 움츠린 그의.. 더보기
[뉴욕 오딧세이1] All About Broadway Shows 격월로 발간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웹진 K-arts에 이번 호부터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이번 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대한 (소설 형식의) 기사다. 학교 측에서 명함까지 파주시는 바람에 기자 정신으로 사진까지 여러 장 찍어 보냈는데, 막상 나온 웹진을 보니 내가 찍은 사진을 멋진 배경으로 만드셨다는.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은 늘 존경스러운 면이 있다. 어쨌든, 그 외에도 흥미로운 기사와 사진, 동영상들이 여럿 담겨 있다. 뉴욕과 뮤지컬, 혹은 예술과 사회에 관심 있는 분이시라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http://webzine.karts.ac.kr/201009m/webzine.html 더보기
[미니픽션] 굿나잇, 웨스트엔드 비가 퍼붓다 그친 차이나타운 거리로 다시 나왔을 때, 우리 중 반 정도는 엉망으로 취해있었다.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제법 마시기도 했거니와, 모인 시간에 비해 너무 빨리 마신 것도 그 이유였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지금 와서 기억나는 것은 오직 목을 알싸하게 그으며 내려가는 술기운뿐이니까. 어쨌든 빗물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검은 물들이 찰랑거리는 그 거리에서, 누군가 2차는 코리안 타운으로! 라고 외쳤고 몇몇 목소리들이 동조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32가에 있는 일명 K타운은 이 시간쯤이면 맨해튼 각지에서 1차를 마치고 2차를 하기 위해 몰려온 한인들로 북적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둘 택시를 잡아 거기서 봐! 라며 헤어지기 시작했고 나 또한 마지.. 더보기
Stories from New York 이야기. 돌고 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이야기. 인종과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서로 다른 취향과 사연과 비밀들이 모여 사는 이 곳에서- 그러므로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Somewhere near West 4th St. mintring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