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평범한 사람들의 새로운 역사 영화를 위해 돌아보니, 2022년 한 해, 많은 역사 영화들이 개봉했다. 여름 극장가에 이 있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그린 (사진)가 11월 개봉했고, 12월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다룬 뮤지컬 을 영화로 개봉한다. 20세기 초 한국 문화계에 등장한 신조어 팩션(faction)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을 보탠 이야기를 지칭했다. 이순신이 무과 시험에서 낙방한 상상을 그린 과 같은 소품들도 있었지만, 한 광대를 ‘너(爾)’라며 특별히 호명했다는 실록 한 줄에서 출발한 같은 명작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사 속 역사 영화의 소재는 매우 좁다. 역사 영화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그 소재나 관심사가 제한적이다. 현대문학 초기 이광수, 김동인 같은 작가들의 역사소설 출발도 그랬다. 이광수는 1928년 를 .. 더보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괴롭더라도 기억해야 할 너의 이야기 “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 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나와 내 자식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행운에 감사할 뿐,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간다.” 이 문장은 2019년 11월 경향신문 특별기획 와 관련하여 인터넷 홈페이지 인터랙티브에 실린 작가 김훈 글 ‘빛과 어둠-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부쳐’ 일부분이다. 글 아래, 1748이라는 숫자를 클릭하면 수많은 사람의 형체가 화면을 채운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1748명 노동자의 구체적 형상이 점멸한다. 사람 모양을 클릭하면 사고 유.. 더보기
표현의 자유를 말할 자격 앞으로 아카데미에서는 다양성을 갖춘 영화만이 작품상 후보가 될 수 있다.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이를테면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참여 여부가 작품상 후보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처럼 눈에 띄는 영역뿐만 아니라 스태프, 마케팅 홍보와 관련된 외적 영역과 영화적 묘사나 주제까지 살핀다.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영화는 점차 아카데미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양성과 관련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일종의 면세 혜택을 누려왔다. 유색인종지수가 워낙 높다 보니 다른 항목에 대한 점검은 면제되었다. 아카데미의 기준을 한국 영화, 드라마에 적용하자면 여러 부분에서 걸린다. 2022년 화제작들만 살펴봐도 그렇다. 등 한국의 블록버스터 대중 서사들은 대개 남성 중심적이다. .. 더보기
떳떳한 거래를 하는 진짜의 세계 윤종빈 감독의 영화 세계는 유사 가족의 재해석이다.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 진짜 형제와 가짜 형제. 한국형 누아르, 갱스터 영화는 브라더, 형님, 아버지, 누님과 같은 유사 가족관계로 위장한다. 카르텔에 비유되는 권력 조직 대개가 그렇다. 조직폭력배나 깡패 집단만 그런 게 아니다. 힘 많은 합법적 권력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 아래 형, 동생, 형님, 아우, 아버님, 어머님, 누이, 동생 등의 끈끈한 비밀 결사로 묶이는 것이다. 어둠 속에 눈먼 이윤이 많을수록 더 끈끈해진다. 유사 가족관계는 사실 어떤 의리도, 충심도 없다는 의심의 가림막이다. 유사 가족의 이름으로 오염을 덮어 주는 관계, 윤종빈은 이 더러운 위장막을 한국 사회 구조의 핵심으로 본다. 그 더러운 끈끈함이 한국 경.. 더보기
미완의 과거와 영화적 화해 ‘내부자들’의 협잡꾼들 단죄와 ‘암살’처럼 밀정을 처단하는 건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닐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길 믿는 일이란 정말로 쉽지 않다 약산 김원봉은 최동훈 감독의 영화 (2015)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안윤옥, 염석진처럼 허구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조승우가 연기한 김원봉은 실제 의열단장 김원봉이었다. 조선독립운동사가 늘 사해평화주의로만 이해되던 시절, 의열단의 행적 자체가 뒷전에 밀린 바도 있지만 결국 북에서 생을 마친 약산의 생애가 그 이름을 낯설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사가 복잡다단한 이념의 파도 속에서 반쪽짜리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몰랐던 이름. 김원봉은 2016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 에도 등장했다. 이번엔 김원봉을 이병헌이 맡았다. 당대 가장 .. 더보기
안나들, 그리고 법의 울타리 리플리 증후군의 장본인이기도 한 리플리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소설 의 주인공이다. 리플리는 타인의 삶을 훔치기 위해 거짓과 범죄를 서슴지 않는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본능적 갈망이다. 사회적 관계와 상대적 차별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숨기고 사는 생래적 질투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리플리들은 사회와 무관할까? 정한아의 소설 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를 보면 오히려 리플리는 결코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재능이 있으나 충분한 경제적 뒷받침을 갖지 못한 인물, 유미는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 삶을 얻기 위해 타인의 정체성을 훔친다. 리플리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노린 건 아니었다. 재수.. 더보기
고독하고, 믿음직한 품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사진)의 영어 제목은 ‘Decision to leave’이다. 영어 제목을 먼저 봤다면 아마도 대부분 ‘떠날 결심’이라고 번역할 듯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헤어지다’는 맺은 관계를 끊고 따로 갈라서는 것을 뜻한다. ‘결심’은 어떻게 하기로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떠나다’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까? 떠나는 것은 벗어나서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이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왜 헤어질 결심이 떠날 결심으로 영역되었는지 알게 된다. 관계를 끊고 갈라서려고 했지만 결국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게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 박찬욱의 영화 에 다가서는 하나의 열쇠다. 또 다른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에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두 개의 곡이 등장한다. 하.. 더보기
상투어에 반대함 “남편이 산에 가서 안 오면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 영화 의 여주인공 서래가 이렇게 말하자, 형사 해준은 의심한다. ‘마침내’라니. 서래는 외할아버지가 한국인 독립운동가인 중국인이다. 박찬욱 감독은 서래 역을 맡은 탕웨이의 한국어가 문장도 완벽하고 정확해서 더 독특했다고도 말했다. ‘마침내’라는 단어에 대한 이물감은 한국어 사용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다. 만약 영어로 번역한다고 하면 그 어감과 문맥이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을 듯싶다. 한국어 문법으로 보아도 ‘마침내’가 틀린 사용은 아니다. 하지만 ‘마침내’는 문맥상 미심쩍다. 단어와 단어 사이, 부사와 부사 사이, 오히려 지나치게 문법에 맞는 올바른 문장은 평범하지 않고 어색하다. 우리의 일상에 사용되는 단어들, 언어들, 문장들은 문법에서 .. 더보기
행복한가요? 행복한가요? 이런 질문을 일상에서 던진다면 위험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왜 사니, 행복하니 같은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질문은 영화나 드라마 속 대사로나 등장할 법하니 말이다. 하루하루의 일상 가운데서 묻기에, 행복이란 무척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다. 행복하냐는 질문은 뒤로한 채, 우리의 일상은 주로 이거 얼마예요? 식사는 했어요? 언제까지 끝내야 해요?와 같은 생계형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5월4일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사진)는 행복에 대한 영화이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한때는 악동이었으나 어느새 환갑이 넘은 1959년생 감독은 여러 번 관객에게 묻는다. 행복하냐고 말이다. 우주를 구하고, 전 인류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에서 행복이란 질문과 주제는 낯간지럽기.. 더보기
역사가 결코 우리를 파괴할 수는 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민진 작가의 소설 의 첫 문장이다. 문학사상의 한국어판 에는 이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낙제했을 때 쓰는 단어인 페일(fail)이 망치다로 번역된 것이다. 전문가가 번역을 했으니 틀림없겠지만 어쩐지 거꾸로 번역을 한다면 망치다라는 표현에 루인(ruin)이 먼저 떠오른다. ‘루인’은 짓밟는 폭력을 연상시킨다. 실패, 낙담을 떠오르게 하는 단어 페일(fail)의 폭, 어쩌면 소설 의 힘은 바로 이 진폭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애플tv플러스가 제작한 드라마 가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 대중적 인기를 먼저 끌고 평단과 언론이 맥락 분석으로 .. 더보기
환상 속 영웅과 비루한 현실 언젠가 원하는 것을 갖는 비극과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글을 쓴 바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나 메리 셸리의 은 말하자면 원하는 것을 갖게 된 비극을 보여준다. 평생 늙고 싶지 않은 욕망,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 불가능한 욕망이 문학과 영화, 예술에 남는다. 영원히 늙지 않는 초상화 속 인물처럼 말이다. 그런데 허구 속에서도 이뤄진 욕망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뤄진 꿈은 결국 괴물로 구체화된다. 죽음의 종말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사의 꿈이 괴물과의 싸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불가능했던 욕망은 실현과 거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판타지의 방식으로 서사화한다. 현실에 정의가 없다면 영화와 소설,.. 더보기
민주주의와 한국적 클리셰 넷플릭스 드라마 이 선보이자마자 보수적 언론사 몇몇은 우려의 글을 실었다. 우려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잔혹성에 대한 걱정이고 두 번째는 과도함에 대한 주저함이다. 잔혹성과 과도함은 연관되어 있다. 잔혹성은 허리를 꺾고, 내장을 꺼내 먹는 식의 야수적 표현을 향한다. 보기에 불편한 것이다. 상상이라지만 묘사된 좀비의 폭력이 익숙했던 것보다 과한 게 문제다. 잔혹함에 대한 우려는 상상이 아닌 현실 묘사에 더 짙게 터져 나왔다.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학교폭력 장면이나 청소년 임신과 출산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수위’가 너무 높다고 표현되지만 이 수위라는 표현이 좀 모호하다. 뉴스나 기사에서 보는 현실의 10대 상황은 묘사된 드라마보다 오히려 더 잔혹하고 잔인하니 말이다. 그럴 때, 점잖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