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성평등 제작 안내서’는 드라마를 어떻게 바꿨나

현재까지 올해 지상파 미니시리즈 시청률 최고 기록은 SBS <황후의 품격>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곧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두 차례의 법정 제재를 받은 드라마라는 불명예 기록에 덮일지도 모른다. 지난달 초, 과도한 선정성과 폭력성, 그리고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 조장 등으로 방송통신심의위의 ‘주의’를 받은 <황후의 품격>은 그 이후 방영된 마지막 회에서 주의는커녕 더 심각한 장면으로 다시 한번 심의 검토 대상이 됐다. 그동안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민유라(이엘리야)가 과거 임신 중이었을 때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이 ‘임부 성폭행’ 장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극본을 쓴 김순옥의 작가 자격을 박탈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제기됐다.

 

그런데 김순옥 못지않게 비판받아야 할 사람은 감독이다. <황후의 품격> 주동민 피디는 지난해 SBS 드라마 <리턴>을 연출했을 때도 비슷한 비난을 받은 전적이 있다. <리턴>은 2018년 지상파 미니시리즈 최고 시청률을 거두었지만, 방영 중에 윤리성, 생명의 존중, 품위 유지, 양성평등, 폭력묘사, 충격·혐오감, 수용수준, 등급분류기준 등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을 무려 8개 항목이나 어기며 법정 제재인 ‘경고’를 받았다. 안방극장 드라마의 표현 수위를 위험 수준으로 높여 놓은 작품의 총지휘자가 1년 만에 복귀해 전보다도 진화한 막장 연출을 선보인 것이다.

 

SBS <황후의 품격>은 민유라(이엘리야·사진)의 성폭행 피해를 폭력적이고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주목할 점은 <리턴>, <황후의 품격>의 폭력과 선전성이 대부분 여성에게 집중되었다는 데 있다. <리턴>에서 법정 제재를 받은 장면만 예를 들더라도, 속옷만 입은 여성들을 뒤에 꽃병풍처럼 세워둔 남성들이 자기들끼리 파티를 벌이고, 조금 뒤 한 남자가 여성의 머리를 유리컵으로 내리치면서 지폐를 던지는 등 여성들을 성적대상화하고 학대하는 장면들이다. <황후의 품격>도 마찬가지다. 노골적인 애정신으로 지적받은 것은 민유라가 황제 이혁(신성록)을 유혹하는 장면, 폭력성으로 제재받은 것은 태후 강씨(신은경)가 민유라를 시멘트 고문하는 장면이다. 이 외에도 이혁이 민유라를 차에 가두고 불을 붙이거나, 정신병원에 가두고 화상 부위에 고통을 가하는 등 중세시대 고문을 연상시키는 폭력신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 같은 행위들은 민유라가 ‘악녀’라는 이유로 감수해야 할 인과응보처럼 그려진다.

 

요컨대 두 드라마의 폭력성, 선정성 논란의 중심에는 여성 혐오가 있다. 그중 최악의 사례인 <황후의 품격> 성폭행 장면의 경우, 언론 대부분이 선정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평등 위반이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서 양성평등 부문인 제30조에는 “방송은 성폭력, 성희롱 또는 성매매 등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하거나 선정적으로 재연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5항이 있다. 방송통신심의위가 2016년 양성평등 항목을 강화할 때 신설한 조항이다. <황후의 품격>에서 문제의 장면은 성폭력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한 신이 아니라 오로지 민유라의 악행에 복수라는 명분을 주기 위해 연장 방송에서 급조한 설정이다. 그리고 연출은 민유라의 다리부터 흐트러진 머리까지 훑어 올라가는 카메라를 통해 마치 ‘몸이 더럽혀진’ 것 같은 느낌으로 담아냈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개정판이 논란에 휩싸였다. 부록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문제 삼아, 군사독재정권의 검열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까지 나온다. 이번 개정판은 여성가족부가 2017년 펴낸 가이드라인에 내용을 약간 더한 것이다. 비난하는 이들이 주장하듯, 이 안내서가 그토록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부록도 아닌 본문의 강제력은 훨씬 막대해야 논리에 맞다. 그렇다면 2017년 안내서가 발표된 이후부터는, 모든 방송이 소위 ‘페미’들로 가득했어야 마땅한데 진짜 그런가? <리턴>은 2018년 드라마다. 피디는 이런 여성 혐오 드라마를 연출하고도 남산에 끌려가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와 더 점입가경인 &lt;황후의 품격&gt;을 선보였다. 이 작품만 예외인 걸까.

 

2017년 안내서 발표 이후, 드라마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물론 성평등을 위한 노력도 있었다. 2018년 방영된 KBS <마녀의 법정>은 여성 대상 성범죄의 심각성을 환기했고, JTBC <미스 함무라비>는 사법부 내 성차별을 비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가족부의 입김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드라마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여전히 데이트 폭력이 로맨스로 미화되고, 여성이 특정한 목적 때문에 남성을 유혹하는 서사가 유행하고, 남성들이 주도하는 장르물에서 여성 연쇄살인 피해자만 늘어갔다. 그리고 ‘성평등 방송 제작 안내서’ 대부분의 항목을 위반한 드라마가 올해 지상파 미니시리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2017년 안내서에서 ‘좋은 방송 사례’로 언급된 작품들의 목록을 보면 더 초라한 현실이 드러난다. 성평등 주제 반영 드라마 사례로 언급된 SBS <불량주부>는 무려 2005년,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2012년 작이다. 2019년 개정판에서도 이 ‘좋은 방송’ 목록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독재정권의 강제 규제 운운하는 이들은 정작 평등이라는 가치나 방송의 개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만 드러낼 뿐이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