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가정의달, 가족의 영화

5월은 가정의 달이라더니, 영화관에도 가족이 많다. 관객도 많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팔씨름 챔피언이 된 마크의 이야기인 <챔피언>,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아버지 귀보의 이야기 <레슬러>를 비롯해 때마침 소개된 인도 영화 <당갈>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레슬러>와 <당갈>은 공교롭게도 모두 레슬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레슬러>는 레슬러로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레슬러 아버지 귀보는 유해진이 맡아 특유의 너털웃음과 사람 좋은 말투로 그려진다. 어쩌면, <레슬러>라는 영화가 유해진의 개성과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슬러>는 한국형 가족 영화의 문법을 거의 고스란히 따라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가고,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에 벅찬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사랑하고, 아끼고, 싸우지만 결국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포옹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가족이니까 말이다.

 

영화 <레슬러>의 한 장면.

 

 

반면, <당갈>은 코미디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지해지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레슬링의 길을 열어 주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아이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이다. 퇴역 레슬러가 자식에게 레슬링 기술을 전파하고,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아들과 딸의 차이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레슬러>가 결국 아버지와 화해하는 아들의 성장담으로 끝난다면 <당갈>은 세계적 수준으로 우뚝 선 여성 레슬러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의미 있는 것은 여자에게 레슬링이란 그다지 권유되지 않는 스포츠라는 사실이다.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보수적인 영국 탄광촌에서 발레를 시작했을 때, 가족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아니, 사실 더 심각하다. <당갈>의 배경은 인도이고, 인도는 최근에도 몇몇 끔찍한 여성 학대 사건사고로 뉴스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분명, 여성 레슬링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은 남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서로 비비는 전형적 남성 스포츠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갈>의 소녀들은 결국 그 남성 스포츠의 세계에 당당히 진출해 나름의 성과를 얻는다.

 

성차의 편견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문법에도 존재한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로 짝지어지는 서사의 관행도 그렇다. 엄밀히 말해 <레슬러>에 묘사된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어머니 역할에 더 가깝다.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창가에 둔 식은 밥을 처리하고, 홀로 청소하는 모습의 묘사를 보노라면 귀보씨는 아들에게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약간의 묘사에 멈추고 결국 영화 <레슬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야 할 진부하고 관습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리틀 포레스트>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15년 넘게 살아온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이 어머니는 딸 아이가 수능을 보고 온 다음 날,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집을 떠난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딸 역시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엄마의 부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마음을 담아내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와 딸은 음식을 통해 대화한다. 엄마에게 배운 음식을 딸이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추측하고, 딸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며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달할 것을 바란다.

 

사실, 가족은 언제나 직설법으로 말하는 사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 상사, 스승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날것의 말을 내뱉고, 돌려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후련하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가족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야말로 제2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의 어머니와 딸이 레시피로 서로 대화하듯이 조금은 은유적이며 간접적인 언어의 창고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강철 심장을 가진 가족은 아니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당갈>의 레슬링 역시 가족의 제2 언어 구실을 한다. 아버지는 딸이 대회에 우승하고 나서 마침내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직설법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은 레슬링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코치하는 과정 내내 육성이 아닌 레슬링의 몸의 언어로 전달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가족의 언어야말로 온도와 열기를 식힐 중간의 번역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솔직할 필요는 없다. 가족 사이에도 거리와 짐작이 있어야 한다. 가족의 마음이 경유할 수 있는 언어의 섬, 그런 중간지대를 마련해 볼 필요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