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칼럼

[내가 사랑한 한끼]가지런한 마음이 필요한 날에는

‘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친구의 친구였던 나무(별명)와 지난 2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나는 살 곳과 같이 살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무는 집이 있었고 함께 살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무는 룸메이트를 구한다며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요가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요가도 요리도 실제로 좋아하지만 나무 앞에서는 더 좋아하는 척을 했다. 나무는 내게 안방을 내줬다.

 

함께 살면 요리를 하게 된다. 칼질을 할 때 가끔 스스로 ‘오, 꽤 하는군’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람들과 꽤 오래 살았군’과 같은 말이다. 혼자 원룸에 살 때는 주방에 자주 서지 않았다.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차리고 싶지 않아진다. 식탁에 요리를 올려놓은 뒤에는 수저를 두 벌은 놓아야 비로소 뿌듯해진다.

라따뚜이. 빵, 수저 두 벌. 흐뭇하다. 창천동불개미

함께 먹는 음식 중 제일은 라따뚜이다. 한 개만 먹어도 든든한 채소들이 몇 개씩 들어가니까 세 명은 둘러 앉아야 한다. 특별한 날이면 그 요리가 생각난다. 고기 없이 채소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처음 라따뚜이를 시도한 건 처치곤란한 가지들이 냉장고에서 뒹굴던 2018년 여름날이다. 당시 살고 있던 셰어하우스 앞에는 못난이 채소들을 떨이로 파는 가게가 있었다. 가지가 7개에 2000원이길래 냉큼 사버렸다. 하지만 가지를 요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날 라따뚜이가 떠올랐다. 애호박을 샀다. 마늘과 양파와 토마토를 썰고 갈아서 토마토 소스를 만들었다. 프라이팬 바닥에 소스를 깔고, 가지랑 호박이랑 큰 토마토 여러 개를 얇게 썰어서 가지런히 냄비에 둘렀다. 가지, 호박, 토마토, 다시 가지, 호박, 토마토를 겹겹이 쌓다보니 조금 경건한 마음이 됐다.

내가 썰었지만, 참 가지런하네. 창천동불개미

불을 올렸다. 타지 않게 지켜봤다. 룸메이트들이 차례로 귀가했다. 빵을 데워서 함께 먹었다. 룸메들이 맛있다고 했다. 그 이후 누군가에게 요리를 대접할 때 라따뚜이는 항상 후보에 있었다. 축하할 일이 있는 날, 가지런한 마음이 필요한 날 라따뚜이를 만들었다.

 

지난 겨울 어느날, 뱅쇼를 꼭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에서 이젠 친구가 된 나무를 포함해 두 명을 뱅쇼 파티에 초대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룸메를 구하는 나무에게 처음으로 요리를 선보이게 됐다. 파티에 어울리는 음식은…역시 라따뚜이다. 요리를 내놓기 전 나같이 소심한 사람의 마음은 쪼그라들기 마련이지만, 라따뚜이와 함께라면 괜찮다. 채소를 썰다보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니까.

 

만들다 보면 가지든 애호박이든 토마토든 개수가 맞지 않아 조각이 꼭 남는다. 그럴 땐 그냥 좀더 잘게 잘라서 맨 가운데 올리면 된다. 마치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처럼.

 

좀 짜? 프랑스 음식이라 그래.

 

싱거워? 네가 처음 먹어봐서 그래, 원래 이런 맛이야.

 

라따뚜이는 댈 핑계도 가지가지다.

 

그날 라따뚜이가 맛있다고 노래를 부르던 손님은 뱅쇼를 마시며 예전에 받은 편지를 읽어줬다. 편지에는 ‘행복의 실감’, ‘모험의 일부’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제 이제 라따뚜이와 그 말들을 연결해 기억한다.

뱅쇼를 마시던 지난 겨울 파티의 현장. 창천동불개미

집에 돌아와서 현관불을 켜고, 슬리퍼를 신고. 마스크를 벗는다. 나무가 집에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지만 언젠가 나무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만간 나무와 라따뚜이를 해먹을 것이다. 나무를 기다리면서 나는 나무와 함께 사는 행복을 실감한다. 나무와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올 때, 지난한 하루는 모험의 일부가 된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을 사람이 있다는 건 그런 뜻이다.

 

창천동불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