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밑지는 생명에 대한 연민

1970년 10월7일, 한 청년이 경향신문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석간이 게시되고 사회면에서 자신이 제보한 기사를 발견한 청년은 감격했다.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제하로 13세 소녀를 포함한 어린 여공들의 무참한 노동환경이 고발돼 있었다. 벅찬 마음으로 신문을 사들고 평화시장으로 달려가던 청년은 한 달 후 자신의 사망 소식이 신문에 실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은 ‘밑지는 생명’을 연민했던 청년 전태일의 기일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기분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수기를 토대로 구성된 <전태일 평전>의 저변에는 연민이 흐른다. 연민은 남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동정과 얼핏 구별되지 않지만 더 깊게 동조돼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 상태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동정과 연민은 시선의 높이로 구별된다. 동정은 여유로운 사람이 불행한 타인을 측은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동정은 표피적이라 금세 흩어진다. 어려운 환경의 이웃을 소개하고 모금해 돕자는 TV 프로그램이 불편한 이유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여 챙길 수 있는 안도감으로 시청률을 올리겠다는 속셈이다. 오해라면 궁핍함을 모욕적일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동정심을 자극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심지어 더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빈곤 포르노라는 악의적 비판까지 등장했다. 감정 소비와 안도감 제공으로 수익을 거두려는 방송사의 상혼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고백처럼 같은 처지이거나 언제든 비슷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공감하는 능력이 연민이다. 불우한 재단사 전태일은 불쌍한 여공들과 주변 빈민의 고통에 신음했다. 얕은 동정과 달리 깊은 연민은 실천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인간선언’이라 평가하며 인간 전태일과 그의 사상을 세상에 알린 책이다. 인텔리겐치아 저자의 노동자에 대한 연민의 끈이 없었다면 감동이 약했을 것이다. 초등교육만을 이수한 채 노동 현장으로 내몰린 전태일은 한문투성이의 근로기준법을 이해하기 위해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했다. 그가 생전에 절실히 찾았던 대학생 친구는 비록 사후에 나타났지만 깊은 연민을 품고 전태일의 싸움에 연대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민청학련으로 수배돼 도망다니며 필사적으로 전태일을 재현해냈다.

 

밀리언셀러 <전태일 평전>의 영향력은 지대하여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영화계에도 굵직한 소재를 제공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영화인들에게 전태일 열사는 숭고한 소재였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박광수 감독을 비롯해 당시 충무로 최고의 역량이 대거 참가해 제작한 영화였다. 아름다운 기획이었고 대중들에게 전태일 열사를 알리는 의미 있는 영화였지만 재미있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년 전태일의 감동적인 삶과 죽음은 극적인데도 극적 인물로 재현하기 어렵다. 영화적 재미는 주인공의 변화에 있다. 어릴 적부터 희생적이었던 전태일 열사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일 만큼 한결같아 플롯을 추진하는 주인공으로서의 힘이 약하다. 평전에 입각해 재현할수록 관객은 생불을 대면할 뿐이다.

 

청소년용 만화로 호평받았던 <태일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언급한 대로 손대기 어려운 소재에다 펼치기는 더 힘겨운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사진)가 완성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밑지는 인생을 위한 연민의 형태와 색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기를 바란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