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칼럼

[조경아의 트렌디하게]내게 차려진 집에서 먹었을 법한 밥

방금 지어 주걱이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밥, 숟가락으로 들기름을 쓱쓱 발라 구운 김, 남의 살 하나 넣지 않고 푸성귀로 끓인 국, 달큰한 양념으로 조린 두부, 멸치볶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여기에 계절이 불러 올라온 김치 한 종지면 충분했던 식단. 집밥에 고기반찬, 화려한 특별식은 필수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가결한 것은 엄마였다. 태어난 때가 1960년이거나 1990년이거나 상관없이 집밥의 기원은 여기 있었다. 검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맛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집밥이란 익숙한 맛과 모양, 그리고 가족의 피와 살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벌어와 만든 부모의 정성이 집밥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외식경영 전문가가 집밥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한 프로그램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 장외에서 때 아닌 엄마전쟁이 벌어진 것은 일견 당연했다.

 

엄마의 노동력이 밖에서도 필요한 시대, 엄마는 집밥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집밥이 없을 순 없었다. 엄마가 하지 않아도, 엄마가 사다놓거나 아빠가 시켜주어도 집에서는 밥을 먹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집밥의 기억으로 남았다. 엄마의 정성, 집의 따뜻함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에서 출발했지만 집밥의 범주는 자연스레 집에서 먹었을 법한 음식으로 확장되었다.

 

집밥이 트렌드의 중심으로 들어서자 집밥은 편의점의 도시락, 패밀리 레스토랑의 메뉴, 소셜커뮤니티의 테마, 한식을 주로 하는 식당의 콘셉트가 되어 집밖으로 나와 질주했다. 집밥처럼 생긴 식당밥, 집밥이라 불리는 가게 밥을 먹으라 권했고, 집밥과는 다르지만 집밥이라 생각하고 먹기엔 나쁘지 않았다. 머릿속 집밥과 입속 집밥이 다르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집밥은 엄마가 한 밥이 아니라 집에서 해 먹는 밥이라고 집밥의 주창자가 고쳐 말하자 집밥은 오늘 존재감이 오히려 명확해졌다. 집에서 해 먹는 밥, 준비하기 쉽고 만들기는 더 쉽고 입에는 착 달라붙는 밥이면 집밥으로 충분했다.

 

자신감이 붙은 집밥 만들기는 누군가를 집으로 부를 수도 있게 했다. 집밥을 해두고 불렀다는 말은 피차 거창한 음식 하나 없어도 부담이 없었다. 집밥으로 대동단결한 격의 없음은 사람 사는 맛, 일상의 소소한 재미로 거듭났다. 집밥이 돌아돌아 본뜻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할머니 손맛이 밴 된장으로 끓여낸 우리 집만의 된장찌개,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하는 비지찌개가 없어도 정서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을 두루 만족시킨 집밥이 내 식탁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족한 기분이 드는 식탁이면 집밥이 된 것이다.

 

서울 청담동의 한 유명 레스토랑에서는 셰프의 레시피가 고스란히 담긴 푸드 박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사람 수에 맞게 재료와 양념 모두를 딱 맞춰 신선하게 배달하는 것. 박스를 열어 동봉한 레시피대로 요리해 먹으면 자투리 채소 하나 남기지 않고 바로 끝난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 우리 엄마 혹은 아빠가 만든 버섯 크림 리소토가 맛있다고 하고 그 기억으로 집밥을 채워갈 것이다. 새로운 집밥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일상, 밥상머리 교육. 밥을 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밥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집밥은 집밖으로 나갔다가 트렌디한 옷을 입고 다시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컴포트 푸드로 불릴 때는 영화 얘기 같고 솔푸드로 불릴 땐 에세이 같던 집밥이 제 이름을 찾고 집에서 해 먹는 밥이 되자 오롯해진 것. 혼자 먹든, 같이 먹든. 엄마가 하든 군인 아들이 하든 함께 밥을 지어 먹는 걸로 먹는 즐거움을 느끼고 영혼의 허기를 메워가고 있다. 김범수는 가족의 마법이라 노래했다. 이적은 함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밥이 뭐길래. 밥은 밥이지만 밥이 아니라는 말이 착 감긴다.

 

조경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