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척하는 삶의 고통과 슬픔

 
넷플릭스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두 작품 <패싱>과 <파워 오브 도그>는 모두 “척”하는 삶을 주제로 삼고 있다. <패싱>은 흑인이면서 백인인 척 살아간 여성의 이야기이며 <파워 오브 도그>는 성소수자임이 분명하지만, 카우보이 마초로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척’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가면은 사회가 씌웠다고 보는 게 옳다. 미국 상류, 주류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모순어법이다. 상류, 주류, 흑인이라는 게 한 문장 안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엔 말이다.

1920년대 미국의 남부 몬태나에 살고 있는 카우보이의 성적 지향성도 마찬가지이다. 1920년대, 특히 남부에, 게다가 농장주인 그에게 있어 동성에 대한 사랑은 존경으로 위장되어야만 했다. 그는 동성에 대한 흠모와 숭앙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문제는 그가 성적소수자가 아닌 척한 게 아니라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자의 가면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람들의 신경을 긁고 괴롭히며 거의 미치게 만든다. 훨씬 남자답게 보이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소를 거세시키며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전시한다. 그는 누가 봐도 허약하고, 예민한 청년을 여자 이름으로 바꿔 부르며 놀리고 핍박하며 괴롭힌다. 마치 자기 자신을 혐오하듯이 그악스럽게 폭력적인 위악을 부린다.

‘척’하는 인물은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에서도 발견된다. 피부색이 꽤 하얀 편이라 백인으로 ‘패싱’할 수 있었던 주인공은 자신을 ‘유대인’이라 속이며 백인 사회에 편입한다. 그 잠입을 위해 혈육과 생이별을 선언하고, 과거도 지운다. 심지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도 반납한다. 흑인 학생에 대한 차별어를 썼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지만 흑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 구원받느니 차라리 쫓겨나는 편을 택한다. 그의 인생 자체가 모순이다.

이 세 작품은 미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모순이자 문제가 바로 차별임을 보여준다. <패싱>과 <파워 오브 도그> 역시 모두 소설 원작인데, 소설을 쓴 작가 넬라 라슨과 토머스 새비지의 자전적 체험이 깊이 녹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 세 사람의 위장된 삶에는 고통과 슬픔이 있다. 적어도 흑인이 차별받지 않았더라면 혹은 성적소수자가 폭력적 환경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지 않았더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거짓된 위장의 가면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스스로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면서, 자신과 가족 모두를 속이면서, 척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었을 거란 말이다. 그들의 위장을 개인의 욕망 차원이 아닌 사회의 그늘이자 증후로 읽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가 그들을 ‘척’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또 이런 척도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많은 미스터 리플리씨>의 주인공 리플리씨 같은 인물 말이다. 그는 타인의 목소리, 글씨, 표정, 말투 등을 따라하는 데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럴듯한 몇 번의 성대모사와 서명위조 솜씨로 그는 넘볼 수 없었던 부자, 디키의 삶을 빼앗아 흉내 내며 살아가는 데 성공한다.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를 게다가 오만하게 남용하던 인물에게서 빼앗아 쓴다. 리플리씨는 디키가 부러워 디키를 없애 차지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리플리씨가 재능을 발휘할 때 후련한 게 아니라 섬뜩하고 불편한 것일까? 그건 상쾌한 전복이 아니라 범죄적 갈취이기 때문이다.

남의 것이 탐나고, 더 잘살고 싶고, 금수저가 부러운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돋보이고 싶은 건 마음속 깊은 욕망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서류에 과장된 허위 이력을 써서 제출하지는 않는다. 그게 양심과 도덕, 윤리의 울타리다.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부터 배워왔던.

대선 후보의 가족이 사실과 다른 경력을 써낸 일이 논란이 되고 있다. 얼마나 사실과 다르고, 어디서부터 그릇된 일인지 좀 더 꼼꼼히 살펴봐야겠지만 이런 논란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코 ‘돋보이기 위한 게 죄라면 죄’라는 해명이다. 때론 해명이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준다.

돋보이는 것은 “다른 것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나거나 좋아 보이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낮추고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척하는 것은 자기 욕망의 회로일 뿐이다. 돋보이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면 그건 반칙이며 폭력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억압 속에서 생존형 가면을 쓴다. 우리가 진정 들어야 할 목소리는 세상이 준 가면을 벗을 수 없었던, 차별 너머의 사람들의 목소리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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