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폼 드라마 <편의점 고인물>의 한 장면.
올 상반기에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JTBC) 첫 화에서는 편의점 본사 매장관리직원 염창희(이민기)와 지점 영업 종료를 앞둔 한 점주가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본사에서 물건 빼낼 때까지 (가게) 문은 잠가두세요.” “어떻게 잠그는지 몰라. 내가 24시간 영업을 10년 했다. 문을 잠가봤겠냐?” 10년 전 편의점 창업에 뛰어든 중년의 남자가 문을 잠그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쉼 없이 일하면서 은퇴할 나이가 되는 동안, 대한민국은 소위 ‘편의점 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편의점 점포 수는 5만 개를 돌파했다. 인구 1000명당 1개꼴로, 한국은 인구 대비 편의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수적 증가만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편의점이 단순히 간편식과 생필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요즘의 편의점은 택배, 세탁, 전기차 충전, 반려견 돌봄, 금융 업무 등 생활 전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최근에는 네트워크를 활용한 미아 찾기 캠페인을 벌이고,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를 공급하는 등 공익 플랫폼까지 표방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인의 거의 모든 삶이 편의점에 압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를 반영하는 드라마의 편의점 묘사도 달라지고 있다. 일찍이 한국문학이 편의점을 88만원 세대의 문화적 기호로 담아낸 것처럼, 드라마에서도 편의점은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바쁘게 살아가는 고단한 청춘들의 일터이자 쉼터로 그려졌다. <청춘시대>(JTBC)에서 등록금과 엄마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던 대학생 진명(한예리), <안나라수나마라>(넷플릭스)의 소녀 가장 윤아이(최성은), <금수저>(MBC)의 생계형 청춘 승천(육성재) 등 최근 드라마에도 편의점을 생계의 최전선으로 삼은 가난한 청춘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경향의 묘사도 두드러지고 있다. 유쾌하고 당돌한 MZ세대들의 ‘핫플레이스’로서의 편의점 묘사다. 2020년 드라마 <편의점 샛별이>(SBS)가 대표적 사례다. 주인공 샛별(김유정)은 소녀가장이지만 캔디형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패기와 발랄함으로 무장한 샛별은 편의점을 ‘인싸들의 놀이터’로 만드는 홍보대사다. 편의점은 더 이상 고된 노동 현장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신상”과 활기찬 이벤트로 가득 채워진 “만능 복합 생활 거점”으로 그려진다. 2021년 웹드라마 <썸타는 편의점>(딩고뮤직)도 비슷하다. 주인공 여주아(최지수)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안, ‘스윗한 점장’ 동현(김동현), ‘츤데레 알바생’ 수빈(정수빈), 훈남 단골 손님 우석(정우석), 재현(봉재현) 등 네 명의 꽃미남과 로맨스를 즐긴다. 편의점은 청춘들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간에 가깝다.
무엇보다 최근의 변화를 잘 보여준 작품은 20부작 쇼트폼 드라마 <편의점 고인물>(씨유튜브)이다. 20대 청춘 하루(박은우)의 편의점 알바 일지를 담은 이 시리즈는 올 6월 처음 공개돼 39일 만에 조회수 1억뷰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화제를 모았다. 편의점 업체에서 제작한 홍보용 콘텐츠임에도 공감 가는 스토리, 감각적인 편집,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 등으로 재미와 호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가장 성공한 기업 홍보 사례가 ‘편의점 공화국’의 어두운 그늘을 제일 잘 담아낸 텍스트로도 읽힌다는 데 있다. 편의점이 모든 사람의 유쾌한 생활거점이 되는 동안 알바생 하루의 업무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기본적인 손님 응대는 물론이고, 잃어버린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고 요리에 신참 알바 교육까지 도맡는다. 고된 일과와 진상 손님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할지언정, 친절한 미소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처리를 자랑하는 하루는 편의점 브랜드의 의인화 그 자체다. 편의점 알바 경력 9년차 청년 노동자의 현실은 계산대 아래 숨겨진 사직서처럼 수면 위로 올릴 틈이 없다.
최근 편의점 업계에서는 정부가 공공기관의 몸집을 줄이면서 민간에게 공적 역할을 분담시키고, 편의점 본사가 이를 홍보 전략으로 삼는 동안, 편의점의 ‘만능 알바’들이 온갖 노동을 도맡아 한다. 편의점 본사가 제작을 지원한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유쾌한 스토리는 역설적으로 ‘편의점 공화국’의 모순적 현실을 더 뚜렷하게 환기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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