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불탔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를 두고 실재(The Real)의 침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에서 가장 먼 곳, 상징계로부터 가장 깊은 곳 너머에 묻어 둔 바로 그것, 실재계의 공포가 도래했노라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나름의 곡해를 해보자면, 설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환상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로 실컷 즐길 수 있었던 것. 결코 현실이 될 리 없으니 쾌락원칙에 따라 즐길 수 있었던 가상. 스크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파괴의 순간들 말이다. 외계인이 침공해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테러리스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 전에는 말이다.
영화 <도어락>의 한 장면.
그런데 요즘 우리는 실재계의 침범과 정반대의 일들을 영화관에서 경험하고 있다. 설마 현실이 될까 싶은 상상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함부로 영화로 다룰 수 없었던 일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중이다. 이는 바로 현실의 침투이다.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주하기 싫었던 공포, 그런 공포가 최근 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재현하는 작품 <국가부도의 날>과 독거 여성의 공포를 다룬 영화 <도어락>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국가부도의 날>을 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1998년에 졸업한 X세대인 나에게 IMF는 덜 아문 상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1998년을 맞았던 그래서 과소비라는 사회적 질타 앞에 묵묵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순진했던 국민들이 영화에 소환되는 순간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래서 그날의 국가부도 사태를 날벼락처럼 당해야 했던 <국가부도의 날>은 공포영화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재난이었다.
2018년에 돌아보는 1997년 12월 ‘국가부도의 날’은 어떤 의미에서 부검 과정과도 닮아 있다. 사체를 해부해 원인을 밝혀가는 과정, 이미 회생불능을 받았던 그날을 해부학적으로 더듬어 다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니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는 어쩌면 시네마 포렌식(cinema forensic)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그건 일종의 범죄였으니 말이다.
<도어락>의 공포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과거였다면 <도어락>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윤대녕의 소설과 트렌디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제시되었던 원룸, 오피스텔에서의 삶은 2018년 현재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돌아와,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20여년 전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원룸과 현재의 원룸은 상당히 달라져 있다.
영화 속에는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누군가 방의 도어락 터치 패드를 건드리고 심지어 손잡이를 흔들더라, 택배 기사나 배달원을 사칭해 여성 혼자 사는 방을 침범했더라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된 나의 이미지, 업무용으로 주고받은 이메일과 명함이 결국 나의 노출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한 폭력과 위협들이 <도어락>에서 개연성 있는 사례로 지나쳐 간다. 문제적인 것은 이런 사례들이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중심 갈등은 납치, 신체훼손과 같은 사이코패스 범죄이다. 하지만 정말 관객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허구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일상이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자의 모습도 그렇고, 신고는 사후에 하는 거지 사전에 하는 게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경찰의 모습도 그렇다. 분명, 스토킹 피해자임에도 회사를 어지럽게 한 원흉으로 지목되어 재계약이 거절되는 모습도 낯설지는 않다. 계속해서 위험을 호소할 때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히스테리나 신경쇠약 환자로 치부되는 과정도 새롭지는 않다. 모두 다 낯익은 것, 이미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인 셈이다.
<악마를 보았다>나 <V.I.P> 같은 영화 속에서 살인이 무서웠던 것은 그런 인물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인물들은 현실에서 만난다기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사실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어락>은 가해자에 대한 공분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공감을 건드린다. 그런 사람 만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의 형편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사실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내는 것, 확률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내가 걸리면 100%인 불운의 세계,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군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는, 우리가 가까스로 외면했던 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상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너무 사실적이라 억누르고 살아가는 공포, 생존하기 위해 외면하는 도처의 위험들 말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위기의 사인을 모르는 척했던 1998년, 내가 잠재적 피해자일 수 있지만 애써 나만은 아니라고 외면하며 하루하루 생존해가는 많은 여성들.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만연한 공포를 모르는 척하고 현실을 속여 가며 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현실이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화적 환상은 사실 현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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