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변의 와인 숍이나 마트에서 2020년 와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와인 병에 찍힌 연도를 빈티지라고 하는데, 이는 포도가 수확된 해를 의미한다. 2020년 빈티지 와인이란 코로나19가 지구적으로 퍼져나가던 그해에 수확된 포도로 만든 술을 뜻한다. 전 세계가 봉쇄나 거리 두기를 하던 그해 포도로 만든 와인이 과연 제맛이 날까라는 의심이 든다.
지난해 4월 프랑스 보르도그랑크뤼연합(UGCB)은 2020년 빈티지 와인에 대한 선물거래 행사인 앙 프리뫼르(En Primeurs)를 진행했다. 보르도는 매년 초 전 세계 와인 전문가들을 불러 갓 빚은 보르도 와인을 시음·평가해 가격을 매겨왔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탓에 우편으로 수백 종의 보르도 와인 샘플을 전 세계 와인 전문가들에게 전달해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2020년 보르도 와인은 ‘그레이트 빈티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19 탓에 와인에 대한 기대는 낮았지만 코르크를 따보니 예상밖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심지어 유명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을 비롯해 전문가들이 2020년 보르도 와인에 역대 최고 점수를 줬다. 세계 최대 와인 검색 사이트인 ‘와인서처’는 “전설까지는 아니더라도 2020년은 보르도의 또 다른 훌륭한 빈티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대륙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인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도 2020년은 악몽이었다. 두 지역은 코로나19에다 몇개월간 지속된 산불과 싸워야 했다. 호주는 6개월간 계속된 산불로 전체 포도 재배 면적의 25%가 불탔다. 그래서 2020년은 ‘산불 빈티지’라는 자조까지 나왔다. 하지만 2020년 호주와 미국 와인은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에도 불구하고 2020년 포도로 맛난 와인이 빚어진 비결은 두 가지다. 먼저 어떤 작황에서도 최선의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현대 양조기술 덕분이다. 두번째는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포도 농장의 토양이 가진 고유한 힘이다. 내가 편의점 진열대에서 무심하게 잡은 2020년 와인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진, 전염병, 기후이변을 겪은 뒤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던 인간과 자연의 저력이 담긴 셈이다.
개인적으로 2020년에 나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봉쇄로 친구나 직장 선후배들은커녕 지방에 계신 어머니와 장인·장모님을 뵙지도 못했다. 그해 명절, 나에게 먼저 전화하셔서 “오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에 또렷하다. 여든의 고령인 그분들을 다시 만나는 건 백신이 나온 뒤에나 가능했다. 그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골방에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작년에 책을 2권이나 낼 수 있었다. 게으른 천성 탓에 원고 마감을 미루기 일쑤이던 내가 작가 생활에서 처음 해본 다작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와인 가게 선반에서 만나는 2020년이 찍힌 와인이 국적을 떠나 반갑다. 무기력하고 우울했던 2020년이 내 긴 인생을 놓고 보면 ‘속 끓던 낭비의 시간’이 아니라 ‘숙성의 시간’일지 모른다는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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