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녹두꽃’, 사람이 곧 하늘이다

2019년 방송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역사’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기획 콘텐츠들이 연초부터 쏟아져나오는 중이다. 이러한 역사 콘텐츠들은, 3·1운동을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넘어 민주공화국 출범의 계기가 된 민주혁명으로 재조명하는 최근의 시각을 반영하고, 최초의 국민주권 국가로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촛불혁명 이후 시대정신까지의 커다란 역사적 흐름이 그려지는 것이다.


제일 먼저 흐름의 물꼬를 튼 프로그램은 1월1일 방송을 시작한 MBC <1919-2019, 기억록>이다. 이 캠페인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3·1운동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100년을 민주공화정의 역사로 그리고 그 첫 주인공으로 ‘이름 없는 영웅들’인 민중을 내세웠다. 역시 1월에 방영한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는 시민혁명으로서 3·1운동의 성격과 민주, 공화를 주창한 임시정부의 의의를 조명했다. 같은 시기 방송한 MBC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에서도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희망했던 임시정부의 정신을 기렸다.


SBS 사극 <녹두꽃>


이러한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은 SBS <녹두꽃>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이 사극은 ‘사람, 하늘이 되다’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방점을 찍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3·1운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본격 민중역사극을 표방하면서 평범한 인물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1894년 전라도 고부 농민 봉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봉기를 이끄는 전봉준(최무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그 봉기에 휩쓸리고 동참하게 되는 백이강(조정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첩의 자식인 서자도 아니고 종의 몸에서 얼자로 태어난 백이강은 이름도 없이 ‘거시기’로 불린다. 그는 전라도 고부의 악명 높은 이방이자 만석꾼인 부친 백가(박혁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데 앞장선다. 그랬던 백이강이 어떤 변화를 통해 동학군 별동대장이 될지는 아직 비밀에 부쳐져 있다. 중요한 것은 전봉준도, 백이강도 역사의 진보를 주도하는 영웅 성장 서사의 주인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녹두꽃>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 셋이 있다. 첫 번째는 고부군수 조병갑(장광)이 물을 가두어 ‘물세’라는 터무니없는 돈을 뜯어냈던 만석보를, 봉기한 농민들이 폭파하는 장면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역사를 아무리 틀어막으려 해도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체제를 뒤엎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지만,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큰 흐름 안에서 그 정신은 도도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두 번째는 방영된 즉시 화제가 됐던 2회 횃불 엔딩신이다.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봉기를 결심한 뒤 횃불을 하나씩 들고 고부 관아 앞으로 모여드는 장면은 촛불시민혁명을 연상시킨다. 드라마는 이 장면을 ‘적폐’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백이강의 눈동자에 투영시켜 다시 강조한다. 백이강이 목격한 것은 거대한 역사다. 누군가의 사주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백성 한명 한명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만들어낸 혁명이다. 드라마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횃불의 뜨거운 불로, 만석보 폭파 뒤의 차가운 물길로,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반복해서 보여준다. 


세 번째는 전봉준의 입을 통해 극의 주제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전봉준의 동문수학이자 강직한 척사파로 고부 농민 봉기에 함께했던 황진사(최원영)는 전봉준이 고부를 넘어 봉기를 확대하려 하자 반대 입장에 선다. 그때 전봉준이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한울님이 있고, 해서 사람이라면 문무양반부터 칠반천인에 이르기까지 다 같이 평등하고 고귀한 존재, 그런 존재가 착취와 수탈에 말라 죽어가는데 이를 외면하고 조정에 선처나 바라자는 겁니까?” 그렇다면 동학이 무엇이냐는 황진사의 물음에 전봉준은 한층 힘주어 답한다. “믿음이고 무기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이 가고 인즉천의 세상이 오리란 믿음, 세상을 뒤집기에 그보다 강한 무기가 또 있습니까?”


사실 촛불혁명 이후의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투영하는 것은 <녹두꽃>뿐 아니라 최근 사극의 주 경향이다. 가령 2017년 방영한 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기존의 신출귀몰한 민중 영웅과는 다른 노비 ‘아모개’의 자식 홍길동(윤균상)을 내세워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이야기했다. 백성들과 함께 폭군(김지석)을 몰아낸 홍길동이 “너의 죄는 위(백성)를 능멸한 죄, 능상”이라고 일갈하는 신은 그해 드라마를 통틀어 최고의 장면이기도 했다. 올해 초 방영된 <왕이 된 남자>는 왕 대신 왕위에 오른 광대 하선(여진구)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이야기를 그렸다. 원작인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달리, 새 시대의 왕을 위해 미친 왕을 죽이는 설정으로 시대적 변화를 담아냈다. 


적어도 4회까지의 <녹두꽃>은 이 같은 최근 사극 경향의 정점이자 촛불혁명의 시대정신을 다시 환기한 작품이다. 그해 광장에서 목격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사람이 곧 하늘’이라 외치는 드라마 안에서 또 한 번 목격했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