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인간수업’, 파수꾼이 사라진 시대의 학원물

학교폭력, 입시 고민, 청소년 인권 문제 등 학원물의 전통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계도의 길 대신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한 <인간수업>은 기존 학원물의 전형적 틀을 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이 여성 성착취 범죄라는 진실을 가려버린다는 점에서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넷플릭스 제공


지난달 KBS는 올해 하반기 방영 예정이던 청소년 드라마 <학교 2020>을 편성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학교 2017> 이후 3년 만에 돌아오는 ‘학교’ 시리즈의 신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은 올해 초 갑작스럽게 주인공이 교체되면서 뜨거운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편성이 불발된 배경에는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지상파에서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가던 KBS 전통의 학원물이자 공영방송의 역할을 환기하는 상징적 시리즈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달 29일, 인터넷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는 최초의 한국 오리지널 학원물 시리즈 <인간수업>을 공개했다. 그동안 넷플릭스는 청소년 시청자를 외면해 온 국내 지상파와 달리, 글로벌 전략 차원에서 십대를 위한 콘텐츠 제작에 큰 공을 들여왔다. <빨간 머리 앤> 같은 고전 리메이크작을 비롯해 <루머의 루머의 루머>, <빌어먹을 세상 따위>,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퀵샌드: 나의 다정한 마야>, <별나도 괜찮아> 등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자체 제작 시리즈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인간수업> 역시 같은 전략 아래 등장할 수 있었던 파격 학원물이다. 이 작품은 학교 폭력, 입시 고민, 청소년 인권 문제 등 학원물의 전통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장르의 특성상 기존 작품들이 차마 직시할 수 없었던 어둠의 심연 속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간다. 단순히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표현 수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수업>의 십대 주인공들은 모두 심각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선택에 죄책감이 없다는 점이다.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이지만 실상은 “미성년자고 나발이고 안 가리고 팔아먹는 악질포주”인 지수(김동희), 역시 완벽한 모범생이나 지수의 비밀을 알고 난 뒤 거리낌 없이 동업에 나서는 규리(박주현), 성매매로 돈을 버는 민희(정다빈), 민희의 남자친구이자 학교 폭력을 주도하는 기태(남윤수) 등 그 누구도 범죄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소위 ‘문제아’들을 극의 중심에 놓고 청소년들의 어두운 현실을 이야기하는 학원물이라도 결국은 ‘계도’의 길로 나아가는 데 비해, <인간수업>에는 애초에 그러한 낭만이나 구원의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지수의 책상에 붙어 있는 “스카이(SKY), 한걸음 위에”라는 문구가 나타내듯이, <인간수업>의 몰인간화된 학교는 모두가 위에 있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세상에서 생존 본능만 남은 아이들은 계속 최악의 선택을 반복한다. <인간수업>은 그 잔혹한 파국의 드라마를 통해 이를 부추기고 방관하는 우리 사회의 음울한 현주소를 냉정하게 돌아본다.


여기까지가 기존 학원물의 전형적 틀을 깬 <인간수업>의 드라마사적 의의라면, 이제는 한계를 이야기할 차례다. 이미 많은 이가 언급했다시피 이 작품은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킨다. 이 사건이 단순히 몇몇 괴물들의 일탈이 아니라 윤리의식이 마비된 현실의 한 단면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인간수업>의 메시지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이야기가 빠졌다. ‘n번방’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 청소년의 시점이다. <인간수업>은 민희 대신 포주인 지수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사업에 동참하는 ‘여고생’ 규리와 그녀가 성매매에 끌어들이는 아이돌 남자 연습생의 존재를 통해 이것이 여성 성착취 범죄라는 진실을 가려버린다.


이 같은 문제점은 민희의 또 다른 포주인 왕철(최민수)을 묘사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부모 없이 살아가며 애정 결핍에 시달리는 민희는 왕철을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그는 극 중 한 대사처럼 ‘레옹’과 같은 애틋한 보호자로까지 격상된다. 왕철이 민희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민희가 “조건도 안 하면 나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부하는 장면은 여성들의 자발적 성매매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사도, 경찰도 아이들을 지키지 못할 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멸의 길에 들어서는 왕철의 비장미 넘치는 최후에서는 작품의 장르까지 바뀔 지경이다.


지상파에서 십대들의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에, 청소년 문제에 귀를 기울인 넷플릭스의 파수꾼 전략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십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빼놓은 채 지금 한국 청소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인간수업> 마지막 회에 학교전담 경찰인 해경(김여진)이 위치 추적 앱을 통해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려 하는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시도는 좋다. 다만, “방향이 틀렸습니다”.


<김선영 TV평론가 herlan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