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꼰대인턴’, 노동권 인식 변화 시대의 드라마

MBC <꼰대인턴>의 가열찬(박해진)은 과거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에서 현재 식품업계의 신화적 인물로 거듭난 인물이다. 드라마는 가열찬과 시니어 인턴 이만수(김응수)를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노동권의 새로운 화두를 다루고 있다.


2014년 방영된 tvN <미생>은 국내 직장인 드라마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한 해 먼저 방영된 KBS <직장의 신>과 함께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거의 최초의 오피스물로서, 진지한 주제의식에 뛰어난 완성도까지 더해지면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서바이벌게임에 가까웠던 인턴 생활에서 겨우 살아남아 계약직 사원으로 채용되지만, 2년 뒤 결국 계약 종료로 퇴사한 주인공 장그래(임시완)는 아직까지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명사 같은 존재로 기억된다.


<미생>의 성공 이후, 그동안 ‘직장인의 애환’으로 뭉뚱그려지곤 했던 노동계의 다양한 현안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가령 JTBC <송곳>(2015)은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통해 부당한 정리해고와 임금 착취 문제를, MBC <자체발광 오피스>(2017)는 무한생존경쟁에 내몰린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문제를 다뤘다. 유리천장을 비롯해 업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비판한 JTBC <욱씨남정기>(2017), 직장 내 ‘미투’ 운동을 그린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 여성 근로자들의 불합리한 노동환경을 조명한 작품들도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한층 다양한 노동 소재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대표적 사례로 MBC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은 드라마 최초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라는 직업을 전면에 내세워 노동현장의 불법 행위와 편법적 관행들을 비판했다. 오피스드라마는 아니지만, SBS <닥터탐정>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하청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을 고발하고 안전보건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가족 같은 회사’라는 슬로건 아래 숱한 폭력과 차별을 봉합해온 직장문화를 꼬집은 KBS <회사 가기 싫어>, 대기업의 횡포에 시달리던 만년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위기와 생존기를 다룬 tvN <청일전자 미쓰리> 등의 작품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올해에는 MBC <꼰대인턴>이 노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다. 지난달 20일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이 코믹 오피스드라마는 탈권위 시대의 화두인 ‘꼰대’를 통해 기업 내 부조리한 조직문화를 비판한다. 특히 다른 문제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직장 내 괴롭힘’을 주요 이슈로 환기한다. 그동안 오피스드라마의 주된 관심은 노동착취, 부당해고, 임금차별 등 물리적 노동환경 개선에 쏠려 있었고, ‘직장 내 괴롭힘’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에 포함된 부차적 이슈로 그려져왔다. 물리적인 노동조건 자체가 워낙 열악하다보니 노동자의 인격권 침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시행된 근로기준법 개정안 이후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동권의 개념을 시대에 맞게 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꼰대인턴>은 이 같은 노동권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오피스드라마다. 주인공 가열찬(박해진)은 현재 식품업계의 신화적 인물로 칭송받지만, 과거 인턴 시절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였다. 드라마는 가열찬이 받았던 고통을 사내 피라미드 구조의 밑바닥 직원이 흔히 겪는 차별의 경험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를 무너지게 한 결정적 원인은 노골적인 폭력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무시하는 인격 침해 행위였다. 가열찬은 능력과 동떨어진 업무를 수행하다 아예 업무에서 배제되고 끝내는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며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그의 고통은 노동자들의 기본적 존엄을 말살하는 폭력으로서 ‘직장 내 괴롭힘’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그런 측면에서 <꼰대인턴>이 가열찬을 괴롭힌 상사 이만식(김응수)을 권위 의식으로 가득한 전형적 꼰대로 묘사하는 것은 일견 적절하다. ‘직장 내 괴롭힘’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해서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만식의 가해 행위는 처벌 대상이지만, 드라마는 대신 그에게 역지사지의 기회를 줌으로써 변화를 유도한다. 시니어 인턴이 된 이만식은 젊은 동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하고 나서야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올해 초 오리온 익산공장에서 일어난 청년노동자 사망 사건과 최근 아파트 경비 노동자의 극단적 선택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개선하고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공론화로 이어지고 있다. 괴롭힘 행위의 근거가 되는 업무상 적정범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하고 괴롭힘 행위자를 사업장 내 사용자와 근로자로 한정하고 있는 등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노동권을 노동자 인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인식 변화가 절실한 시대다. <꼰대인턴>은 그 시대적 요구를 관통하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herlan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