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SF8’의 야심찬 콘텐츠 실험

SF 옴니버스 시리즈 은 인공지능, 증강현실, 재난 등 미래 사회의 소재들을 다룬다. SF 시리즈답게 첨단기술로 무장한 미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려내지만, 사실은 현대 사회의 그늘을 더 뚜렷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평가받을 만하다. 드라마홈페이지 캡처

지난 10일, 한국영화감독조합과 MBC, 그리고 토종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업체 웨이브가 협업한 8부작 SF 옴니버스 시리즈 <SF8>이 공개됐다. 8월14일 MBC 방영 전, 웨이브를 통해 먼저 선보인 <SF8>은 영화계와 드라마계 그리고 원작 소설을 포함하면 문단계까지, 한국의 문화콘텐츠를 이끄는 세 분야가 손을 맞잡고 탄생시킨 야심 찬 융합 프로젝트다. 플랫폼 다변화 시대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라가기보다, 참신한 실험과 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감독 8인이 각각 한 편씩 연출을 맡아 인공지능, 증강현실, 재난, 게임, 안드로이드 등 미래 사회의 소재들을 녹여낸 8편의 이야기가 신선하고 다채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 중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노덕 감독의 ‘만신’과 민규동 감독의 ‘간호중’이다. 먼저 ‘만신’은 발전한 과학기술문명이 미신적인 운세를 뒷받침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가까운 미래,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운세 프로그램 ‘만신’이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 무려 96.3%의 적중률을 지닌 이 운세 서비스를 맹신하는 ‘만신의존증’은 급기야 종교로 발전하는가 하면, 사상 최대의 실업률과 국가신용도 하락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심각한 사회부작용을 낳는다.

 

‘만신’은 <SF8> 시리즈 가운데 지금 우리의 현실세계와 가장 닮은 이야기다. 배경 연출에서부터 특수효과로 구현한 첨단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제자리에 고여 있는 듯한 도시의 뒷골목이나 낡은 건물 등을 더 많이 담아내고 있다. 심야의 거리를 비추는 오프닝 시퀀스도 범상하기 그지없다. 자정이 되자 새롭게 갱신된 만신의 운세를 보기 위해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거리의 사람들 모습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집으로 향하는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적 귀가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 만신의 메시지로 깨달음을 얻은 뒤, 만신 전도사가 된 주인공 정가람(이동휘)이 이끄는 집회 풍경도 기시감이 느껴지긴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시대에 삶의 좌표를 잃고 흔들리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만신’은 SF가 낯설고 어렵고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면, <SF8>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간호중’은 SF 장르의 정석적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 프로젝트의 총괄자이기도 한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인공지능이 상용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SF 장르의 오랜 주제 중 하나인 인간과 비인간, 그 타자와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주인공 연정인(이윤영)은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자신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고급형 간병로봇(이윤영)을 구한다.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엄마와의 병원 생활은 정인을 점점 지치게 하고, 간병로봇은 흔들리는 정인을 지켜보면서 매뉴얼에는 없는 스스로의 기묘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간호중’은 이 작품이 생명과 윤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한다. 후반부 간병로봇의 선택과 그를 바라보는 사비나 수녀(예수정)의 갈등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으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변한 피조물에 대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지금의 한국적 상황과 맞닿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극 중에서 간병 로봇의 인기는 우리 사회가 곧 진입하게 될 초고령화의 그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과거 정인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헐리고 그 자리에 요양병원이 지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 음울한 현실을 좀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SF8>은 SF 장르를 세계적으로 대중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미러>의 한국판으로 불리기도 한다. <블랙 미러>가 첨단기술로 무장한 미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는 SF 시리즈이지만, 사실 현대 사회의 그늘을 더 뚜렷이 비춘다는 점에서 무리 없는 비교다. <블랙 미러>에서 다뤄진 계급 양극화, 인종 차별, 젠더 차별, 난민 증가, 인간 소외 등의 사회문제들은 지금 우리 옆에 있고, 기술은 그 병폐를 증폭시키거나 거울처럼 비추는 도구로 작용할 뿐이다. ‘만신’과 ‘간호중’은 바로 이 길을 따라간다.

 

<SF8> 제작 발표회 당시 민규동 감독은 “크고 어렵고 서양의 독점 장르로 인식되는” SF 장르를 우리가 만든다는 것의 의의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SF8>은 단순히 그러한 의의를 넘어선, 충분히 상찬받을 만한 실험이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