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루머’, 국내 웹드라마의 진화

오피스 스릴러 장르인 <루머>는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던 여성의 죽음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무한경쟁 시스템, 폐쇄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문화 등의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올 상반기 드라마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넷플릭스 <킹덤> 시즌2, tvN <사랑의 불시착> 등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작품들과 SBS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2, JTBC <부부의 세계> <이태원 클라쓰> 등의 화제작들로 이야깃거리가 풍성했다. 무엇보다 지난해 최고작으로 평가받은 KBS <동백꽃 필 무렵>에 이어 SBS <스토브리그> <하이에나> <아무도 모른다>, tvN <블랙독>, MBC <꼰대인턴>, 넷플릭스 <인간수업> 등 신예 작가들이 극본을 맡은 작품들이 유독 주목받으면서 드라마계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전망도 쏟아졌다.

 

하지만 하반기 드라마 시장은 다소 달라진 모양새다. 3년 만에 시즌 2로 돌아온 tvN 최고 기대작 <비밀의 숲>은 아직 예열 중이고,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제작이 중단된 드라마들이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눈부신 성과라고 할 만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웹드라마다. 상대적으로 제작 부담이 적고 검열에서도 자유로우며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웹드라마는 기존의 TV 드라마를 조금씩 대체하는 추세다. 올해는 젊은층 취향에만 맞춰진 스토리나 낮은 완성도 등의 고질적 단점을 개선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다. 지난달 토종 OTT 업체인 웨이브를 통해 선공개된 SF 앤솔로지 시리즈 <SF8>이 대표적 사례다. 신선한 소재와 실험적 형식이 돋보이는 이 시리즈는 국내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은 프로젝트로 호평받고 있다.

 

15회째를 맞이한 국제 드라마 시상식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도 이 같은 웹드라마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올해 처음으로 시상 부문에 ‘숏폼’을 추가했다. 30분 내외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들이 경쟁하는 이 부문에선 본심에 진출한 4작품 중 3편을 한국드라마가 차지했다. 두 여성의 치명적 워맨스를 표방하는 <엑스엑스(XX)>, 로맨스 미스터리 <눈 떠보니 세 명의 남자친구>, 그리고 오피스물 <루머>가 본선 진출의 영광을 안았다. 현재 웹드라마 시장을 선도하는 제작사 플레이리스트, JTBC의 크로스미디어 스튜디오 룰루랄라, CJ ENM의 스튜디오 다이아가 각각 제작을 담당한 세 작품은 국내 웹드라마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라인업이기도 하다.

 

제일 눈길을 끄는 작품은 스튜디오 다이아의 <루머>다. 오피스 스릴러 장르인 <루머>는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던 여성의 죽음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무한경쟁 시스템, 폐쇄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문화 등의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가볍고 경쾌한 로맨스가 주류를 이루는 웹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을 깰 만한 진지한 사회고발 드라마다. 주인공 이지원(김다예)은 뛰어난 업무 능력과 성실한 근무 태도로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한다. 하지만 지원의 성공이 회사 실세 한상무(주석태)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대가라는 루머가 떠돌기 시작하고, 지원은 절망 속에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지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뒤 사내 게시판에 그녀의 사망이 타살이라는 글이 올라온다.

 

드라마는 지원의 연인이었던 박선재(채종협)가 지원의 사망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는 직원들을 차례로 면담하면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구성을 취한다. 서로 엇갈리는 직원들의 증언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죽음의 진실은 우리 사회 직장문화의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보통의 웹드라마가 숏폼의 한계로 인해 메인 플롯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직장 내 괴롭힘 고발이라는 주요 주제 이면에 섬세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인 선재의 시점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지원의 진짜 고통을 대변하는 다른 동료의 이야기로 이동하는 후반부,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만들어진다.

 

<루머>가 증명한 국내 웹드라마의 진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당장 콘텐츠 공룡 카카오M이 다음달부터 <연애혁명> <아만자> <며느라기> 등의 화려한 웹드라마 라인업을 차례로 공개한다. 훗날 2020년의 한국드라마를 돌아볼 때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은 웹드라마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