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조작’, 기레기 시대의 종말을 꿈꾸다

*영화 <공범자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TV 월화드라마 ‘조작’ 포스터.

 

보수정권에 의한 언론 장악 10년사를 고발한 영화 <공범자들> 초반부는 2008년 2월25일 KBS 뉴스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한 이 보도는 곧바로 후보자들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뉴스가 방송된 날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는 점이다. 새 정부와의 ‘허니문’ 기간이라는 관례도 개의치 않은 채 언론이 직언직설을 서슴지 않았던 이 시기를 두고, 영화 속 한 기자는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은, 영화 속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시피 정권 탄압에 의한 언론의 가파른 몰락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년간의 언론인 소재 드라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MBC에서 방영된 국내 최초의 전문 보도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저널리즘 황금기’의 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특히 ‘신문·방송 포함 언론매체 신뢰도 1위’ 언론사였던 시절 MBC의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MBC에서는 <PD수첩>을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들의 위상이 굳건했고, 손석희, 엄기영, 김주하 같은 간판 언론인들이 팝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정작 드라마 자체는 실제 언론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손예진, 지진희 등 스타배우들이 연기한 세련된 기자들의 모습에는 대중들이 신뢰하고 동경하던 언론인에 대한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 2009년 방영작 MBC <히어로>에도 이 같은 판타지는 생생했다. 소시민을 대변하는 군소신문사와 족벌언론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작품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시대의 ‘히어로’로서 기자들을 그려낸다. 극 종반부, 거대 언론사의 범죄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기자들의 1인 시위와 그를 향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아직 언론과 대중의 신뢰관계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론 장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공교롭게도 언론인 소재 드라마 역시 TV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그사이 권력에 주눅 든 언론은 빠르게 추락하다가 끝내 ‘히어로’에서 ‘기레기’로 전락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2012년 방영된 SBS <추적자>에서는 ‘히어로’와 ‘기레기’ 사이, 그 과도기에 위치한 언론이 비쳐져 있다. 한 소녀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이 드라마는 정치, 자본과 결탁해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언론의 타락을 묘사한다. 소녀의 아버지인 홍석(손현주)이 권력의 감시를 피해 도주하는 곳곳마다 CCTV처럼 접하게 되는 뉴스 속보와 기자들의 카메라는 권력의 언어만을 “받아쓰기”하며 약자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는 이 시기 폭로된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이 언론에 미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석의 편에 선 단 한 명의 기자만이 과거의 이상적 시절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그에게는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두 편의 기자 드라마, KBS <힐러>와 SBS <피노키오>가 등장한 2014년은 이미 ‘기레기’라는 용어가 일상화된 시대였다. 두 작품은 이 같은 언론 후퇴에 관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극화한다.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언론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 시절과 현재를 병치시킨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보수신문사 회장 김문식(박상원)은 ‘기레기’의 표상 그 자체다. 이는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와 함께 언론을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공범’으로 인식하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한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피노키오>는 “시청자에게 먹히는 것은 팩트보다 임팩트”라며 선정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 기자, 진실 보도와 저조한 시청률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두 얼굴을 통해 권력뿐 아니라 상업주의에 굴복한 ‘기레기’의 현실도 고발한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조작>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이 드라마는 탄핵정국 이후 언론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영화 <공범자들>과 더불어 ‘기레기’ 시대의 종언을 고하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범자들>이 영화 속 부제로 ‘기레기’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언론의 자기반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조작>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여기에 ‘히어로’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를 ‘기레기’ ‘식물기자’라 부르는 언론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되돌리려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한무영(남궁민)은 얼핏 보면 <히어로>의 진도혁(이준기) 계열의 열혈기자 캐릭터에 가깝지만 결코 이상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의 과격한 보도 방식은 보다 이성적인 기자 석민(유준상)이나 검사 소라(엄지원)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주 수정되고 타협점을 찾아간다.  

 

자기반성과 함께 자부심의 회복도 중요한 주제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에서 김민식 PD는 언론 탄압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패배감, 무력감을 꼽았다. 생계로서의 직업인인 동시에 시대를 향한 사명의식이 큰 언론인들에게 정권의 부역자들은 하나같이 ‘너 아니어도 돼’라는 말로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조작>의 최종권력자 구태원(문성근) 또한 기자들에게 이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그를 향해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기자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뿐’이라고 답하는 <조작>은 ‘기자 히어로’와 ‘기레기’ 시대 이후의 새로운 기자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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