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진실의 발언권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이야기의 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이입을 선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역사보다 소설이나 영화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소재보다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대한 격언인데, 말하자면 있었던 일을 다룰 때 고증보다는 그 일을 가운데 둔 전체의 얼개, 플롯에 더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이 지면에서,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피해자를 그려낼 수 없는 우리 이야기의 가난함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아직 우리의 피해는 사죄받지 못한 것이기에,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에 거리나 여유를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영화 <귀향>이나 <택시운전사>가 역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영화 문법이 그저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나치게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는 뜻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매우 놀랍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여러 미덕을 가진 영화이다. 그중 최고의 미덕은 바로 상처와 피해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이다. 피해라는 말이 주는 핏빛 이미지처럼 피해자는 언제나 숭고하게 그려야만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좋은 독일군도 있고, 나쁜 카포(Kapo: 수용소 중간 관리자)도 있곤 하다. 선량하지만 무능한 피해자도 있고, 잔혹하지만 필연적 악을 행하는 가해자도 그려지기도 한다.

 

참혹한 일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경험이 역사가들의 일거리가 되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사건 외부로 튕겨 나온 듯한, 염결한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경험했던 것들은 사실이다. 그처럼 생생했던 사실들은 어떤 기록보다 더 사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증언들을 들어보자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경험적 사실이 진실에 닿기에 여러 번의 자맥질이 이어진다. 쇼샤나 펠만이 말했듯이 이렇듯 진실과 사실이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증언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 잡는 것일 테다. 사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야기의 힘일 테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그 역사 뒤편의 상처들은 이런 인간학적 다양성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도 첨예한 잘잘못과 닿아 있다. 아직 법률적 판결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그 상처를 다룰 때면 인간학과 심리적 다양성보다는 윤리적 보편성과 도덕적 선과 악, 법률적 판결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점에선 미학적 쾌감보다는 도덕적 심미안으로, 즉 재미보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영화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재미나 미적 완성도를 따지는 게 어쩐지 무척 불경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 캔 스피크>는 증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것까지 증언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재미있다. 주인공인 나옥분 할머니(나문희)는 괴팍한 동네의 말썽쟁이로 등장한다. “도깨비”라는 별명처럼, 동네 슈퍼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미워할 것 같은 이 할머니를 마지막 순간 모두가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몫이고 성과이다. 영화는 그럴듯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 나옥분을 통해 이 과정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역사적 상처와 사건이 묵직한 무게감과 감동으로 깊어진다. 웃기고 이상했던 할머니를 존경스럽고, 안아주고 싶은 할머니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힘이다.

 

또 한 가지 <아이 캔 스피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을 배우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배우 나문희가 “이 나이에 주연을 하는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건 단순히 여배우 주연 캐스팅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시나리오가 여성을 요구했고, 이야기가 할머니를 필요로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만 눈길을 돌리고, 관심사를 넓혀본다면 세상엔 꼭 이야기가 되어야 할 ‘역사’가 숱하게 많다.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역사’라서, 다룰 필요도 없는, 보편적이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사실이 너무 많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여성 인물은 굳이 나누자면 피해자에 속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 나옥분이라는 이름과 ‘발언권’을 주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피해자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쩌면 영화가 피해자를 영화에 모시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와 말할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 있다면 영화는 건널 수 없는 두 공백을 이야기로 메우는 작업이다. 영화는 할 수 있다. 진실을 초월하는 어떤 사실들에 목소리를 주는 것, 그런 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