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나만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

영화로도 만들어진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피신인데, 영어권인 인도에서 그 이름은 오줌싸개(피싱)와 거의 똑같이 발음된다. 프랑스에서 가장 맑은 수영장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이 이름으로 살다가 피신은 평생 놀림거리가 될 듯싶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먹는다. ‘내 이름을 파이(π)로 바꾸자’라고 말이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잘했어, 오줌싸개”라며 비아냥거린다. 2교시가 시작될 때도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다시 소개한다. 다만, 무한대 숫자인 파이를 한 열 자리 정도 외워서 소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칠판 가득 파이의 무한대 숫자를 외워 쓰고는, 자신의 이름을 파이라고 소개한다. 그날 이후 아무도 소년을 피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오줌싸개는 무한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K’ 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왼쪽)과 ‘릭 데커드’ 역을 맡은 해리슨 포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이름을 바꾼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없다. 개명이나 예명, 필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 세상에 처음 새겨지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곧 운명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해서, 자기 이름을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부모도, 국적도,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의와 무관하게 갖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이름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 운명을 바꾸려면 적어도 파이의 무한대 숫자 정도는 외워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운명과 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이름과 운명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세대 리플리컨트(복제인간) 넥서스8을 쫓는 블레이드 러너의 이름은 ‘K’이다. 말이 이름이지 이니셜도 아니고 물품에 붙어 있는 바코드의 일련번호와 다르지 않다. 폭동과 반란을 거듭하던 구세대 리플리컨트들과 달리 새로운 복제인간들은 제조자의 말에 순종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K는 K라고 불리는 데 별 저항감이 없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껍데기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다. 그에겐 애당초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왜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할까? 즉 누군가 나를 낮잡아 부르거나 아예 나라는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 왜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아픈 걸까?

 

가만 보면, 자존감과 인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름이다.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 준 부모들은 벌거벗고 태어난 우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결국 우리는 이름의 값을 정당히 대접받기 위해 세상에서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말이다.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일 것이다. 내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 말이다. 반대로, 이름이 없어서 즉 무명의 존재라서 세상으로부터 괄시받는 느낌 역시 무척이나 아프다. 그 아픔은 결국 차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더 따갑고 아플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문제작인 <무명의 주드>의 제목이 무명의 주드 곧 이름 없는 존재, 주드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설 속에서 주드는 끊임없이 세상이 알아봐 주는, 유명의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는 익명의 존재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도, 아들도, 사랑했던 연인도 외면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죽음의 순간, 가장 비참한 신의 자식 욥의 이야기를 외우며 눈을 감는다는 사실이다. 주드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진 그 순간, 비참의 형태로 사랑을 확인했던 신의 이야기를 읊조린다.

 

과연 K는 마지막 순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창조주의 그림자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른 채 스스로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K의 자아 정체감을 느끼게 했다면, 사랑받는다는 그 불확실한 착각도 무명의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만으로 복제인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자존감이 만들어진다. 결국, 사랑이 인간다움의 열쇠라는 것일까?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허약하지만 분명한 증표가 아닐까? 마음이라는 수수께끼,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실체를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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