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진짜’의 품격

혼자, 먼저, 초대받아 보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죄송하지만, 영화 <덩케르크>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봐야 제격이다.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아이맥스 상영관이란 필름 영화 최고의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상영 시스템이지만 사실, 보편화되어 있거나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덩케르크>가 아이맥스와 65㎜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미 관객들 사이에서는 아이맥스 영화관 예매 열풍이 불고 있다. 적어도 <덩케르크>만큼은 극장에서 그리고 아이맥스 전용 상영관에서 봐야 한다는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한국 영화계에 ‘플랫폼’이라는 낯선 용어를 일상어로 전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 <옥자> 입장에서야 이런 현상이 반가울지 당혹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영화 상영 시스템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 때문에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말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옥자>는 상영관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콘텐츠이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TV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나 혹은 VOD와 도대체 영화관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사실주의 및 아날로그 영화의 장인으로 불린다. 이 호명엔 몇 가지 맥락과 의미가 숨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사실주의란 소재만 두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나 <인셉션>은 현실에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아예 현실적 감각으로는 체험하기 어려운 허구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 배트맨과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는 또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실주의의 장인으로 불리는 까닭은 최대한 눈속임으로써의 영상기술의 사용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인셉션>에서 거리가 폭파하는 장면은 직접 폭발물로 연출했고, <인터스텔라>의 대규모 화재나 먼지 폭풍도 사람의 손으로 재현해냈다. 영상물을 적당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봐 복사하기, 붙여넣기를 하지 않고, 찍고 싶은 장면을 사실적으로 구성한 뒤 그것을 촬영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재현(representation)과 모방(mimesis)의 가치를 신봉한다.

 

봉준호 감독 역시 필름 카메라와 사실적 재현을 사랑하는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암시하듯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시각적 재현의 사실성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봉준호 감독에게는 <설국열차>가 마지막 필름 영화였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과 편리성의 확장으로 이제는 아날로그 필름으로 작업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 것이다. 마치 필름 카메라가 취향으로 남고 실용성에선 거의 모두 디지털 카메라로 대체되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덩케르크>를 보자면 역시 영화는 소재, 이야기, 구성, 배우 모든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우선 아름다운 볼거리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아이맥스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 숭고함을 체험하게 된다. 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필름과 아이맥스 카메라를, 그리고 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고집했는지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최대한 실재에 가깝게, 그건 우리가 스크린 위에 담겼던 첫 번째 영상물, 첫 번째 영화를 보고 느꼈던 그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다.

 

물론 필름 카메라나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런 리얼리즘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덩케르크>의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뛰어난 영화 촬영술을 전쟁의 스펙터클 즉 화려하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의 노출에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우리에게 전쟁영화는 사실감 넘치는 전장의 스펙터클화에 치중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총격을 받아 눈이나 머리가 관통당하고, 장기가 훼손된 채 울부짖거나 잃어버린 다리를 붙들고 울고 있는, 전장의 초근접 촬영술과 그것의 재현이 바로 전쟁영화의 문법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헥소고지>든 <연평해전>이든 최근의 전쟁영화들은 이렇듯 관객들에게 당시의 처참한 상처들을 스펙터클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그 카메라를 공포로 옮겼다.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관객의 공포가 아니라 전장에 있었을 그들, 그들의 개연적인 공포 말이다. 이 시점 이동을 통해 덩케르크의 생존자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아서 생존한 사람들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덩케르크 해안에서 사망한 병사들이 나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나빠서 죽은 것과도 같다. 사람의 생과 사를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막막함. 그 처절한 무력감이야말로 전쟁의 공포이다. 전장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지혜만으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생과 사가 우연에 맡겨지는 것, 사실 그게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것들은 이런 것일 테다. 단순히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노출적 볼거리가 아니라 너무 똑같아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일상을 한 번쯤 멈추게 하는 자극, 그래서 그 자극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정서적 환기. 만약 이런 것들이 여전하다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가는 수고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