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82년생 김지영’과는 정반대 묘사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인격화된 보고서이다. 김지영이 갑자기 빙의 증세를 나타냈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학적 가치가 더 높은 책이다. 문학적으로 따지자면, 김지영의 삶은 문제적이며 전형적이라기보다는 기획적이다. 작위적인 부분도 있고, 인물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어긋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39년생 윤덕수의 삶을 그린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김덕수에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이 개인사로 스쳤듯이 82년생 김지영에게 또래 여성들이 겪었을 만한 일들이 모두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문제적인 것은 그런 김지영에게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이 공감은 김지영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대개의 여성들이 겪은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중 하나 이상을 비슷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공감에 있어서 가장 수준 높은 기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특이한 인간의 돌출적 행동을 이해하게끔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고, 개츠비처럼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뺏으려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뫼르소처럼 햇빛이 따가워서 사람을 죽이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문학은 이렇듯 이해하기 힘든 사람조차 인간학적 관점에서 공감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관념조차 인간 이후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인간학적으로 대단한 결점이나 매력을 가지지 못한 김지영에게 이토록 많은 공감이 쏟아지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이미 문학적 사건을 넘어서 사회적 사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사태들 말이다.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몇몇 남성 팬들이 격렬한 혐오감을 표현하며 더 이상 팬이길 거부한다고 말한, 그런 사태 말이다. 어느새 <82년생 김지영>은 단순한 소설 한 권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82년생 김지영>과 정반대로 인물을 다루고 있다. 김지영이 시대성에 눌려 자아나 내면이 거의 탈색된 동시대적 인물이라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버는 거의 완벽하게 시대를 벗어나 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몇 년도인지,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강렬한 주관성의 세계 안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동의를 구한다. 어느 여름, 집으로 초대되어 온 젊은 학자에게, 17살 소년 엘리오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혐오하면서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싶어하면서 미워한다.

 

1인칭으로 서술되었던 원작 소설과 달리 제임스 아이보리가 각색한 영화는 철저히 카메라의 시선에 이야기를 맡긴다. 관객들은 카메라와 같이 엘리오의 말과 행동을 봄으로써 분석해야 하며, 올리버의 행동과 말을 같은 방식으로 예측한다.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드디어 고백하기까지, 모두에게 그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엘리오에게 올리버가 미스터리이고, 올리버에게 엘리오 역시 물음표이다. 그 둘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두 사람의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추측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적 혼란에 동참하고 비밀을 공유한다. 다른 성적 취향의 관객이라고 해도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관찰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머물 수밖에 없는 감정의 경유지이기 마련이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세련되고, 우아하며 무엇보다 직관적이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이처럼 세련된 간접화법을 구사하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뜨겁게 외쳐서 쟁취해야만 했던 자유였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폭력과 소외마저 감내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세련된 간접화법을 갖지 못했으나 반향을 얻었던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세련된 문법으로 동시대를 벗어나기에는, 지금, 이곳에, 아직 여성이기에 견뎌야 하는 공포와 차별이 너무나 많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여성이 길거리를 마음대로 걷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모험인지를 책 한권 분량으로 써냈다. 영어에서 거리의 여자는 창녀이지만 거리의 남자는 건달을 의미한다. 이게 무슨 우연인가, 이럴 땐 영어와 한국어의 간극이 무색해진다. 밤늦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은 성폭력의 잠재적 대상이 된다. 민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물론 남자든 여자든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솔닛의 말처럼 성폭력의 일차적 표적은 여자이며 사실 그런 폭력은 이미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생기는 공감은 레베카 솔닛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밤늦게 센트럴파크를 조깅하다 강간 피해자가 된 여자 이야기를 보며, 학원에서부터 쫓아온 남학생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고 마는 김지영의 공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직 세련된 개인의 문제가 되기에는 여성의 문제는 훨씬 더 많이, 깊이 가야만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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