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가만히 있지 않는 것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쓰리 빌보드>와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처음이겠냐마는, 말 그대로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끄는 여성 인물 영화는 오랜만이다. 두 작품 모두 그렇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아이를 강간살인사건으로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나 냉전시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말 못하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그들 모두 약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두 여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생명체를 구출한다.

 

물리적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두 여성 인물은 모두 ‘을’에 가깝다. 딸아이의 죽음 이후 범인을 찾고 싶지만 사건은 일 년이 지나도록 흐지부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숟가락 개수도 헤아릴 만큼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인데도,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안됐다고 이야기할 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일을 벌인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광고판 세 개에 일 년치 광고비를 선납하고 메시지를 게재한 것이다. “죽어 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아무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거지, 윌러비 경찰서장?”라고 말이다. 동떨어져 있는 세 개의 입간판은 불연속적인 세 개의 낱말 카드와 같다. 상징적인 세 문장, 하지만 조용했던 마을은 이 문장들이 입간판에 쓰이는 순간부터 시끄러워진다.

 

역설적이게도 19살 소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간당하고, 불태워졌을 때보다 세 개의 상징적 문장이 광고되자 마을이 더 시끄러워진다. 작고, 보수적인 마을의 남자들은 밀드레드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한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그렇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 경찰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 경찰서장은 말기암에 걸려 죽어가는 중이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밀드레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딸이, 소녀가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죽은 딸을 되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딸들을 구하기 위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 잊혀질 뿐이다. 가만히, 조용히, 잊혀질 뿐이다. 영화 속 엄마의 말처럼, 가만히 있지 않은 그 며칠 동안 경찰은 일 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조사를 하고, 지역 언론은 몇 번이나 취재를 해간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리사가 듣는 말 역시 비슷하다.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고 소변을 본 후엔 씻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기 신체 일부를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지만 타인의 손을 잡기 전엔 손을 씻지 않는다. 그 신체 일부가 타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초가 남미 어느 늪에서 잡아온 피조물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그 피조물은 비록 우리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의사소통도 되고 감정의 교류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초 관리자에게 그 피조물은 열등하고 이상한 물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리자에게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모든 게 다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니 열등하다. 여성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우선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가졌으니 열등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리사가 열등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형상’은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백인 남자가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결격 사유를 지닌 열등한 존재이다. 결함을 가진 이상 여자나 괴물이나 흑인이나 괴물이나 모두 다 똑같이 열등하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무시받고, 협박받고, 천대받는 그들이 힘을 모을 때 발휘된다. 물속 피조물이나 말 못하는 여성이나 다 똑같이 열등하다면 적어도 그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없다. 엘리사가 연구소에서 피조물을 구출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사에게 그 피조물은 우리보다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체이다. 즉 그 피조물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똑같은 존재이니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함과 차별로 이뤄진 게 아니라 생명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인 셈이다.

 

힘을 가진 자들, 해결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하곤 한다. 가만히 있어라. 그들은 을이, 피해자가, 힘없는 자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으면 거슬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최근 점점 더 커져 가는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건 힘없는 자들의 존재증명이자 권리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