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김장과 연탄, 그리고 겨울풍경

요즘은 거의 지불하지 않는데 오랫동안 김장 보너스라는 게 있었다. 대우 좋은 공기업과 대기업에서 많이들 줬고, 얼마라도 안 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월급은 밀려도 김장 보너스는 줘야 한다는 희한한 세상이었다. 김장에 목숨 걸던 한국인의 풍습이었다. 1994년도 기사를 보니 김장 보너스가 본봉 기준으로 포항제철 150%, 금성사 50%라는 뉴스가 ‘재계에 따르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1997년도 연합뉴스는 “김장 보너스가 사라지고 있다”고 길게 기사를 냈다. 보너스라는 형태의 추가 임금은 이미 주식회사가 생겨나던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는데 김장 보너스라는 이 별난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60년대쯤 공무원이 먼저 시작한 것도 같다.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후생을 두껍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설날 무렵 주는 떡값 보너스와 함께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는 보너스였다.

1970년대에는 이맘때면 삼륜차와 리어카가 골목을 누볐다. 연탄과 김장재료를 날랐다.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배추 몇 포기에 연탄을 얼마나 들이냐를 놓고 10월부터 고민했다. 먹을 게 김장 말고는 흔하지 않은 겨울을 보내던 때라 김장을 200포기씩 하는 집이 흔했다. 식구 수가 많아도 돈이 없어서 50포기, 70포기 정도만 하고 소금을 많이 쳐서 아껴 먹곤 했다. 김치찌개는 기본이고 넣는 재료에 맞춰 일고여덟 가지는 되던 다채로운(?) 김칫국, 익은 정도에 따라 조리법이 달라지던 김치를 쓴 반찬들이 기억난다. 김치에 김칫국에 김치볶음이 반찬의 전부일 때도 있었다. 그 시절 광에 묻어둔 김칫국에 말아먹던 국수의 맛은 잊을 수가 없으리라. 괴로웠던 건 매일처럼 나오던 신김치 처리용 우동국수와 김치죽이 아니었을까 싶고, 마가린 넣고 까만 프라이팬에 볶던 김치볶음밥은 정말 좋았다. 막 설탕값이 싸져서 듬뿍 쳐서 달게 볶아 먹었다. 김가루 같은 건 부자들이나 쓸 수 있는 특별 고명이었다.

연탄도 100장, 200장 들이면 부자였다. 부잣집 연탄광은 봄이 되면 연탄이 쌓였던 흔적이 드러나는데, 내 키보다 훨씬 높게 검은 자국이 묻은 벽은 그 집 가장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우리 집은 쌓아놓기는커녕 툭하면 새끼줄로 두어 장씩 연탄가게에서 사다 나르곤 했다. 배달을 하면 웃돈이 붙었고, 주소가 ‘산 000번지’인 산동네는 겨울이면 연탄 실은 트럭이나 리어카가 올라가지 못해 미끄러지곤 했다. 연탄재를 빙판길에 깨부수어 미끄럼을 막는 게 그 시대의 풍경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나 같은 가난한 소년은 우울했고, 더 춥게 느껴지곤 했다. 가난이 추위를 부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우리는 학교에서 방학이 될 때까지 조개탄을 때는 교실에서 2학기 마지막 무렵을 보내곤 했다. ‘소사’ 아저씨에게 잘 보여서 조개탄 양동이를 더 많이 얻어오는 ‘주번’을 칭찬하면서. 그렇게 타온 난로 위에서는 양은도시락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소년들의 마음도 높아져서 마냥 춥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날씨가 추워진다. 그렇게 막막하던 시절도 살았으니 또 살아본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연재 |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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