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8) 안석환 - 나는 한때 똥파리였다

안석환 | 배우


내 나이 서른셋이던 1991년 초겨울의 일이다. 데뷔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무명이었다. 당시 나는 이장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 <명자 아끼꼬 소냐>에 캐스팅돼 러시아 사할린을 거쳐 일본 삿포로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영화에서 나는 식민지시대 일본순사 역을 맡았기 때문에 머리를 완전 배코로 밀었다. 지금이야 배코로 미는 것이 개성 있는 패션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배코를 본다는 것은 절간의 스님들이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

 

자정이 훌쩍 넘어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인해 나는 거나하게 취한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 2시까지 운행하는 광화문~원당 좌석버스였다. 막차여서인지 버스 안은 초만원이었다.

 

나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기 때문에 서울시청에서 타면 한참을 가야 한다. 버스 뒷좌석 쪽으로 사람들을 뚫고 비비며 들어갔다. 부딪치는 사람들마다 불쾌하게 쳐다보다가도 이내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의 모습은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다. 빡빡 깎은 머리통에, 인생 막장 같은 더러운 인상, 어디서 얻어입은 것 같은 허름한 쥐색 트렌치코트…. 아마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괜히 시비 붙었다간 더럽게 걸려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배우 안석환 l 출처:경향DB

 

버스 후미는 조금 덜 복잡했다. 복도쪽 좌석의 팔걸이가 시야에 들어오기에 해당 좌석에 사람이 앉아있음에도 무턱대고 좌석 팔걸이에 엉덩이를 디밀고 걸터앉았다. 많이 불편하고 불쾌했을 텐데도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은 두려움 때문인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그 사람이 일어났다. 당연히 좌석은 내 차지가 됐다. 이번에는 옆사람을 꼬나봤다. 그 사람은 나의 시선을 피해 차창 밖을 응시했다. 난 취한 척하며 스르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조는 척했다. 그 사람 역시 한 정류장도 못가서 좌석에서 일어났다. 난 두 좌석을 차지하며 아예 옆으로 누워 버렸다. 불쾌해해는 뭇 시선들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사실 미안한 감은 별로 없었으나 떳떳하지 못함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염치없게도 ‘아~ 양아치, 조폭, 비리의 온상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 거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버스는 어느덧 화전(항공대)을 지나 가라뫼(강매)에 도착했다. 일어나 보니 아직도 버스 안은 만원이었다. 그 정도 왔으면 승객들이 빠질 줄 알았는데 그날 따라 능곡이나 원당 승객이 많았나 보다. 제길! 나는 들어올 때와 똑같이 사람들을 밀쳐내며 버스 앞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못본 척하면서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의식되면서 약간의 죄책감으로 나 또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앞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자책 때문인지 고함이 터져나왔다. 고래 고래 악을 쓰며 걷노라니 아파트 주민 중 한 사람이 5층 베란다의 문을 열고 “시끄러! 빨리 들어가서 자빠져 자!” 하고 소리쳤다. 이에 질세라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야! 내려와, ××야. 밟아줄 테니까!”라고 내질렀다. 아파트촌은 조용해졌다. 빡빡머리 때문일 것이다.

 

난 또 노래를 부르며 내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눈물이 났다. 그날 난 누구든 덤비면 실컷 패주고 싶었다. 아니, 내가 진짜 바란 것은 누군가로부터 흠씬 두들겨맞는 것이었을 테다. 무명의 설움, 잘 풀리지 않는 나의 삶에 화를 낸 것이지만 결국 그날 내가 확인한 것은 왜소하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뿐이었다.

 

난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나는 얼마나 비겁한가’라는 화두를 꺼내면 그날 밤이 떠오른다.

 

그 당시 그 버스에 타셨던 고양시민 여러분! 행신동 주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