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5) 백기완 - 아, 그 어떤 사랑 이야기

 

백기완 | 통일문제연구소장

 

 

내 한살매라는 게 몽땅 뉘우침의 누더기다. 거기서 바늘자국 하나를 집어낸들 무엇에 쓸까, 그러면서 학림다방에 앉아 멀리 지는 꽃잎을 보노라니 문득 ‘그때 그 녀석은 내가 죽였지’ 그런 죄의식에 오싹한다.

 

1956년 바로 이 자리다. 6·25 우당(전쟁) 때 부산부두에서 막노동을 같이하던 부두 녀석이 오랜만에 ‘쐬주’ 한잔 하잖다. 더듬한 데서 딱 김 몇 조박으로 ‘막쐬주’ 서너 사발을 꿀꺽꿀꺽, 그런데 누우런 가래를 덤터기로 쏟질 않는가.

 

“야, 너 어디서 무엇을 하는데 그래.”

 

“응, 사람 사는 데서 살지 뭐.”

 

그러고선 또 게울 때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대병원 문을 왕창 부수고서라도 입원을 시켰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런 성깔을 갖고서도 왜 못했을까. 어리석은 한이 하늘을 가르는 것 같다.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l 출처:경향DB

 

그가 부두 노동을 할 적엔 중학교 5학년, 매우 말쑥한 얼굴에 빛나는 두 눈, 아무리 일이 고돼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공부가 으뜸인데도 늘 책을 놓질 않는 건 대학에 들면 고등고시를 보아 법관이 될 거라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목도꾼이던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매를 맞고 허리를 못 쓰는데도 피란살이라, 다시 목도일을 하시다가 짐에 치여 돌아가셨다.

 

하지만 회사에선 그 죽음을 숨기느라 가마니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는 말을 듣고 바닷가를 헤매며 “아버지, 아버지” 눈물 젖은 채 어느 헛청에서 <흘러간 옛노래>라는 연극을 담배 한 꼬치를 주고 보다가 잡혀가 매를 맞게 되었다.

 

“어린놈이 어떻게 이런 빨갱이 연극을 보게 되었더냐. 네 애비가 목도꾼이라면 네 피도 더러워 불온한 사상을 가졌지.”

 

모진 매도 아팠지만 목도꾼의 피는 더럽다는 말에 부두는 생각이 홰까닥 돌고 말았다.

 

고등고시 따위론 안되겠다, 차라리 연극 무대에서 내 꿈과 사람의 꿈을 살리리라, 그러다가 서울로 와서는 홀어머니 때문에 뻔데기 장사, 메밀묵 장사, 닥치는 대로 막노동, 그 뒤 강원도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진폐증으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그에겐 사랑하는 댓님(연인)이 있었다. 1951년 여름, 부산 광복동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비끼다가 눈을 마주친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마치 천년 앞서 만났던 것처럼 홀로 댓님을 삼은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서울로 와서 눈 오는 밤 “메밀묵 사려~” 그러다가 뜻밖에도 통인동에서 만나 밤새 걸은 것이 모두인 그네들, 사랑의 애달픈 여울목.

 

그 뒤 부두는 강원도 탄광의 광부가 되고 대학생이 된 그 가시나는 서울 둘레에서 노동을 하면 안되냐고 발을 구르고.

 

부두의 말이었다. 나는 지금 노동자의 피는 캄캄한 석탄더미 그 어두움을 뚫는 맑은 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오. 사랑의 힘으로 이리로 오시오.

 

그 여학생은 꽃은 산에만 피는 게 아닙니다 그러고.

 

갑자기 부두의 새뜸(소식)이 끊기고 나서다. 그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부두씨를 서울 쪽으로 오게 해달란다. 그가 올 때까지 미국 유학도 뿌리치고 한없이 글월을 띄우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띄운 글월이 자꾸 돌아오자, 기완씨, 나는 그이가 올 때까지 내 젊음이 다하는 20년을 기다리겠다고 하더니 아, 달구름(세월)은 흘러 거의 예순 해.

 

1984년 겨울, 내가 찾아야겠다고 강원도 폐광지대를 헤매었으나 부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그를 기리는 시 ‘북을 때려라’를 긁적였다. 그것을 전노협(민주노총 전신) 출범식에 띄우기도 했지만 그가 너무나 안타까워 얼마 앞서부터는 두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 아니 한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200자 원고지로 300장, 500장은 더 써야겠다고 했는데 거리에서 부르는 소리에 얼짬(잠시) 붓을 놓고 있지만 늘 붓을 달리는 마음이다.

 

아, 나에게 부두는 무엇일까. 아니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부두는 누구일까. 그야말로 오늘 이 썩어문드러진 반역의 역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샘이라고 들이댄다. 노동자의 피는 캄캄한 석탄더미 그 어두움을 뚫는 맑은 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는 그의 말이 그것이요, 따라서 그는 역사 진보와 함께 지금도 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사랑을 오늘의 한 전형으로 살려내고 싶다. 비록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서도 자그마치 20년을 기다리다 마침내 찾아 나섰다는 그 지칠 줄 모르는 그네들의 두 줄기 맑은 샘, 떠올릴수록 눈시울을 들쑤신다

 

그래서 마저 쓰려 하고 있다. 참된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어설픈 넋두리인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늘 쫓기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