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4) 이호재 - 영어를 좀 알았다면

이호재 | 연극배우

 

1970년대 중반쯤이었나 보다. 그때만 해도 해외 자유여행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외국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수속이 복잡했고 신원조회며 재산 정도까지 신고해야 할 판이니 나같은 연극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던 극단(동랑 레퍼토리)이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로 공연을 가게 됐다.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동랑 유치진 선생님과 현 서울예술대학의 유덕형 총장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선 댈러스, 미네아폴리스, 뉴욕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댈러스극장의 후원회원인 어느 미국인 가정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내 후배와 둘이서 공연기간 묵게 되었다. 단독주택 한채였지만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게 출입문도 완전히 나눠져 있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집주인 가족들은 출근을 해야 한다면서 우리에게 냉장고며 세탁기 등 부엌 가구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마음 놓고 쓰라고 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친절한 음성과 몸짓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때 벌써 ‘아! 영어를 좀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때는 학교에서 배웠던 ABC조차 거의 잊어버린 때였다.

 

연극배우 이호재 ㅣ 출처:경향DB

 

아침 식사시간에 내가 봐서 알 수 있는 음식은 빵과 콜라, 커피였다. 우리를 대접한다고 평소보다 많이 차렸는지 큰 식탁에 음식이 가득했다. 우선 빵을 먹으며 손에 닿는 음료수를 무심코 집었는데 하필 그게 콜라였다. 그걸 마시고 오렌지와 비슷한 모양의 노란색 과일을 집었다. 주인이 칼로 반을 쓱 잘라 먹길래 나도 따라 칼로 썰었더니 모양이 이상했다. 가로로 잘라야 했는데 세로로 자른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인데 맛은 좋았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너희 나라에도 이런 과일이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내 후배는 “예스. 예스. 예스는 예슨데, 노”라고 말했다. “그것과 비슷한 오렌지는 있는데, 정확히 그건 아니야”라는 대답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럴듯하긴 한데 주인은 영 불편한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그 과일은 자몽이었다. 여하튼 그럭저럭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서 아까 못 웃었던 웃음을 시원하게 웃어댔다.

 

다음날 아침 우리 방 앞에는 콜라 두 상자와 자몽 두 상자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집주인이 우리가 그것을 특별히 좋아한 줄로 알았던 것 같다. 후배와 나는 “이거 안 되겠다. 이러다가 우리 둘만의 망신이 아니라 우리 극단 전체가 우스워지겠다”며 차라리 직접 마트에 가서 맛있는 걸 사먹자고 의기투합했다.

 

댈러스라는 곳은 자가용이 없으면 돌아다니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걷자니 너무 황량한 도시였다. 그래도 손짓발짓해가며 물어물어 가까스로 마트라는 곳에 걸어서 도착했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마침내 내 눈에 단박에 꽂힌 식품을 발견했다. 기대하지도 않은 보신탕을 발견한 것이다. 후배와 나는 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린이 분유통만한 보신탕 한 깡통을 사서, 기분 낸다고 남들 산책하고 조깅하는 개울가 벤치에 앉아 맛있게 먹었다. 으쓱해진 나는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라. 우리보고 식생활 문화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면서 자기네들도 은근히 개고기를 먹는 거야. 다만 끓이는 게 아니고 통조림 형태인 게 다를 뿐이지. 너 그 옆에 고양이 그림 있는 거 봤지? 이 사람들은 고양이도 먹는 거야. 우리나라도 탕으로 끓여서 먹는 사람도 있다잖니? 요리하는 방식만 다른 거야.”

 

의기양양하며 먹고 있는 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먼 나라 미국까지 와서 보신탕을 먹었다는 그 뿌듯함에 상쾌하게 극장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먹은 게 애완용 개 사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귀국하면 영어를 꼭 배워야지’ 결심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해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 후회는 계속 진행 중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후배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늦지 않았어’ 하는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