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2) 김홍탁 - 낯선 자극을 놓친 20대

 

김홍탁 | 제일기획 마스터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프랑스의 롱샹(Ronchamp) 성당을 두 눈으로 본 것은 내 나이 마흔셋이었을 때다. 마치 동화책에 나올 법한 동그란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동안 로마의 바티칸, 바르셀로나의 파밀리에 성당을 비롯, 한국의 명망 높은 사찰 등 명품이라 칭송받는 웬만한 건축물을 거의 돌아봤지만, 그 건축물들이 웅장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건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는 롱샹 성당이 처음이었다. 이런 세상에…, 건축물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다니…. 그것은 마치 음악도 아닌 미술작품을 보면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그 후로 ‘만약 내가 스무 살 청년일 때 롱샹 성당을 마주했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그런 감동을 받았는데, 훨씬 감수성이 촉촉한 청년기에 그 성당 앞에 섰더라면 나는 아마도 전공을 바꿔서라도 건축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꿨으리란 생각이 든다. 종교를 제대로 갖지 못했지만, 롱샹 성당의 제단 아래서 ‘오, 하느님! 이제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라고 방언하듯 깨달음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김홍탁 마스터 l 출처:경향DB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십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말은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시기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인생관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지금의 나 역시 이십대를 관통한 나의 생각과 경험들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이십대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 이십대에 나는 롱샹 성당을 볼 수 없었다. 가장 후회되는 점이다. 아니 꼭 롱샹 성당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상에 다른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었다. 로르카의 민중시를 잉태했던 안달루시아의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숲에 가볼 수 없었고, 속세를 떠났던 초월주의자 소로의 월든 호수를 거닐어볼 수 없었으며, 아홉 살 이후로 평생토록 단테의 영혼을 잠식했던 베아트리체가 오가던 베키오 다리를 건너볼 수 없었다. 나의 이십대는 지구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로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해외여행을 법으로 금지하는 정말 이상한 나라에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이십대 청년들을 보면 가장 부러운 것이 젊음의 열정과 모험심을 배낭에 꾸려 넣고 지구라는 혹성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여행경험이다. 혹자는 지금이라도 배낭여행을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중요한 것은 배낭여행이 아니라 이십대의 여행이다. 내가 이십대에 해외여행을 맘대로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내 기질상 방학 때마다 아니 휴학을 하고서라도 어쩌면 대학을 때려치우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집삼아 떠돌았을 것이고, 그런 유목민의 생활에서 받은 낯선 충격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되새김하면서 나의 용적을 넓히고 상상력의 한계를 늘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 길이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피끓는 청춘의 시기에 낯선 곳에 나 자신을 던져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 것이다.

 

직업이 광고인이다 보니 이십대 청년들을 만나면 크리에이티브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어김없이 받는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도 어김없이 똑같다. 여행을 떠나라.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라. 그래서 끊임없이 자극을 즐기고 생의 용적을 넓혀라. 그 뜨거운 체험을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그대들은 작가가 될 수 있고,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광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극받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따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