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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9) 김정운 - “고려대로 가주세요”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

 

“어디로 갈까요?” 택시기사는 내게 물어봤다. 택시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든 말해야 했다. “안암동 고려대학교로 가 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마디다.

 

1980년도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이야기다.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내 인생은 오늘날까지 형편없이 꼬이게 된다. 갑자기 본고사가 폐지되고, 예비고사와 내신성적만으로 대학입학이 결정된다고 했다. 몇 개 대학이든 서류지원이 가능했다. 재수를 했던 난 두 군데에 지원했다. 연세대학교 공과대학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원래 난 이과였다. 건축과를 가고 싶었다. 그 당시 연속극의 주인공은 다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동건설 바람이나 국내 강남개발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난 폼 나는 건축사무실에서 아름다운 여인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귀족적 분위기의 남자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가 고려대 문과대학을 지원할 생각이 든 이유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였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 동창 녀석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역사와 사회모순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함께 재수하기로 하고, 자기만 후기대학에 덜컥 입학해버린 여자 친구도 어느새 운동권 ‘보케블러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더듬으려고 달려드는 나와 역사와 민족을 고민하는 대학 서클 선후배와 비교하며 그녀는 내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날 떠나간 그녀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 I 출처:경향DB

 

면접날 아침, 난 그렇게 고려대로 향했다. 그리고 겨우 1년 다니고 제적당했다. 기세등등하던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제적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이면 군대에 강제징집해 끌고 갔다. 그때 함께 군대 끌려간 이들 중에는 죽어 돌아온 이들도 많았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고려대 민주광장 한복판에 진혼비를 세우기도 했다.

 

독일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도피였다. 가까운 친구들은 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했다. 난 죽어도 그쪽 체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제국주의’에 유학갈 수도 없고, ‘매판자본’의 대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결국 마르크스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진보적 학자들이 몰려있던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너무나 자존심 상하던 ‘보따리장사’ 시절을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체질이 아니었듯, 교수도 내 체질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한번도 누구에게 배울 마음도 없었고,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던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난 안암동으로 향한 그날 택시 안에서의 결정을 후회한다. 사실 내가 건축가 체질인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그 1970년대 연속극 남자 주인공처럼 폼 나는 건축사무소에서, 난 가만히 있는데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 날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그런 귀족적인 삶이 내 체질이다. 탈모에, 아랫배는 나오고, 성격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토록 고약하고 우중충한 삶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내 인생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 버렸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후회’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르기 때문이다. ‘후회 없는 삶’은 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노예에게나 가능한 삶이다. 난 격조있는 건축가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격정적으로 살았던 내 젊은 날을 무척 사랑한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날들도 너무나 기대가 된다. 그러나 그날, 그 택시 안에서 어디로 갈 거냐고 다시 묻는다면 난 숨도 안 쉬고 ‘신촌’으로 간다고 할 것이다.

 

나를 흠모하는 여인들을 향해 아주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연속극 속의 건축가가 내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건축설계는 전혀 안 하고 그저 우아한 표정을 짓기만 하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