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8) 최백호 - 스물아홉 홀어머니의 소원

최백호 | 가수

 

예전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는 유행가가 있었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이랑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목을 쥐어짜 소리치던 노래였다. 그런 노래를 어릴 적부터 불러댔던 덕분인지, 아니면 천성적인 단순한 뇌구조 때문인지 나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그야말로 한 점의 미련도 후회도 없다. 그렇다.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미련스럽게도 참으로 건강하다.

 

그래도 뭔가 후회되는 일이 있을 거야 하고 굳이 찾아봐도, 나의 기형적인 짧은 기억력으로는 생각해낼 기억들이 별로 없다. 다만 외동아들 손잡고 나들이 한번 가고 싶어 하셨던,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그 작은 소원 한번 못 들어드린 일, 대입 예비고사를 보다가 점심시간에 ‘이게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냥 나와 버렸던 일(아는 문제가 너무 없기도 했지만), 그리고 스무 살 봄날에 긴 생머리, 하얀 티셔츠, 청바지에 흰 운동화 접어 신고 딸딸거리며 나타났던 첫사랑 아이에게 사랑고백 한번 못해 봤던 일, 뭐 그런 정도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부선망 독자로 오지 말라는 군대에 들어가 7개월 만에 원주 1하사관학교 조교대 2층 내무반의 그 눈부시도록 하얀 외벽에다 시뻘건 각혈을 쏟고 국가보상금 11만5000원을 받아 1년 만에 의병제대하여 나라에 부담을 끼쳤던 일, 당장 먹고살기 힘들어 가까운 선배가 소개해줘 들어간 부산 서면의 동보극장 간판실 보조일을 하루 만에 때려치우고 나와 그 선배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일(나는 그때 간판실에 들어가면 바로 간판을 그리는 줄 알았다). 후회할 일이라면 그 정도다.

 

 

 

그러다 어찌어찌해서 무명의 통기타 가수가 되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던 라이브 클럽에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동창생 녀석들이 찾아왔는데 그놈들 술값 내주기 싫어 주방 뒷문으로 비겁하게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20대 초반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친구 녀석이 기타 치며 노래를 한다니 격려도 해줄 겸 술이나 한잔 얻어먹자고 찾아왔는데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 술값이 내 한 달 출연료와 비슷했으니….

 

그날 밤 그 친구들이 시계나 주민증을 저당잡힌 걸 나중에야 알았다. 뭐 그 정도야 우리 시절엔 흔했던 이야기들이니 후회라고까지 할 건 없다. 그런데 앞에 잠깐 언급을 했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기억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다. 변명 같지만 내가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적응하지 못했던 큰 이유 중 하나가 교과서를 달달 외우지 못하는 짧은 암기력이었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SBS 라디오의 작가들도 나의 이 지독한 암기력 장애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 1년 넘게 같이 일하고 있는 PD나 작가들의 이름을 두세 박자 뒤에 생각해 낸다거나 방금 불러준 가수의 이름이나 곡명을 10초도 안되어 까먹고 허둥대는 모습을, 그것도 생방송 중에 자주 봐야 하니까 말이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라던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건 내가 부를 수 있는 100여곡의 노래 가사나 멜로디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필요할 땐 언제라도 떠오른다는 것이다. 나의 뇌 속엔 영어단어 기억방과 노래가사 기억방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팔자다. 그래서 그 팔자대로 부산에서 1년반 정도의 무명가수 생활을 한 후 호주머니에 단돈 5만원, 그리고 통기타 하나 달랑 들고 서울로 흘러왔다. 어찌어찌 판(앨범)을 내 그게 좀 알려지고 그 후 36년의 세월,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인간으로, 가수로 그런 대로 잘 살아왔다. 이런 내게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정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벚꽃잎 터질 듯한 이 봄날… 스물아홉 꽃 같은 나이에 혼자되셨던 우리 어머니께서 왜 아들 손잡고 나들이를 가고 싶어 하셨는지 환갑, 진갑 다 지난 이 나이에야 나보다 더 무뚝뚝한 머슴애 같은 딸내미 하나 키우며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후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