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6) 김운경 - 왜 깨끗한 껌을 골랐을까

김운경 | 방송작가

 

십여년 전,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이 만개하여 인파로 붐빌 때의 일이다. 당시 고 박영석 대장의 원정대를 따라 시샤팡마라는 티벳의 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물론 정상 등반은 어림없고 베이스캠프까지만 따라가는 조건이었다.

 

잔뜩 들뜬 나는 원정대 사무실을 가려고 SBS를 나와 여의나루역으로 향했다. 허나 어이없게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순복음교회 지하도 쪽으로 가고 말았다. 지하도 근처에서 서성이며 몇몇 행락객에게 여의나루역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였다. 지하도 입구에 앉아 나를 올려보고 있던 청년이 힘겹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껌을 파는 지체부자유 청년이었다. 그의 앞에는 누런 박스가 깔려있었고 그 박스 위에는 껌 10여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 여의 나… 루 역… 저어기… 쭉 가… 면 있… 어요.” 그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 쌍둥이빌딩 쪽을 가리켜 주었다.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껌을 팔아주기 위해 청년이 펼쳐놓은 껌을 훑어보았다. 껌은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과 먼지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다. 어떤 것은 윗부분이 찢겨져 너덜거리는 것도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깨끗한 껌을 하나 집어 들고 1000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그 청년은 내 기억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버렸다.

 

그 뒤, 나는 박영석 대장을 따라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서 전진 캠프로 향하고 있었다. 연일 고산병에 시달리던 나와 동행했던 정용권 기자는 일행들 틈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대오에서 낙오되어 길을 잃고 말았다.

 

당황하여 길을 찾아 헤매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천지사방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기진맥진 탈진한 우리는 더 이상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 아무데고 주저앉고 말았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조난당한 곳은 몸을 가릴 만한 바위 하나 없는 끝없는 너덜 지대였다.

 

우리는 비장하게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으며 비박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만일 일행들이 오늘 밤 안으로 우릴 찾지 못한다면… 우린 어쩜 이곳에서 생의 최후를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내와 귀여운 아들, 딸,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이 눈물겹게 스쳐 갔다. 갑자기 담배 한 개비를 조용히 피우고 싶어졌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등산바지 속의 라이터를 꺼내려는 순간,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은 일회용 라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회용 라이터와 같은 크기와 무게의 껌이었다. 지체부자유 청년에게서 1000원 주고 샀던 그 껌. 그것이 등산복 주머니에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이 먼 곳 시샤팡마까지 날아온 것이다. 나는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묵묵히 껌을 들여다보았다. 껌은 주머니 속에서 부대낀 탓인지 유난히 맑게 빛나고 있었다.

 

왜 나는 그 청년이 펼쳐 놓았던 더러운 껌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껌을 골랐을까. 찢겨져 안 팔리는 껌을 고를 생각은 왜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못나고 어리석게 살아온 나였다. 나는 갑자기 울컥해지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다시 내게 삶이 주어진다면 꼭 더러운 껌을 고르리라.

 

우리는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어둠 속에서 박영석 대장에 의해 구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