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43)최태지 - 발레를 얻고 친구를 잃다

‘발레를 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정말 떠오르는 직업이 없다. 그만큼 발레는 확고한 나의 삶이다. 발레를 시작한 이후 오늘까지 발레는 항상 나와 함께 했다. 발레는 내 일생 최고의 친구이다.

 

국립발레단 최태지 예술감독 I 출처:경향DB

나는 교토의 작은 마을 마이쓰루(舞鶴)에서 태어나 자랐다. 발레와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사고방식이 진취적이고, 서구적이셨던 어머니께서 “발레라는 서양무용을 하는 여자는 세련되고 예뻐진다”고 초등학생인 언니와 나를 무용학원에 데려가셨다.

일본의 무용학원은 직업무용단이 몇몇 소도시에 지부 차원의 연구소를 설립해 가르치는 형태이다. 마이쓰루 시에는 무용연구소가 딱 하나 있었다. 도쿄에 본부를 둔 가이타니무용단은 교토나 오사카, 마이쓰루 등 일곱 개의 시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처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연구소 문을 들어섰을 때 우리를 맞이해주신 분은 이마이츠 선생님이셨다. 그 분을 보는 순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실제로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특히 발레동작을 보여주시던 모습은 어린 내 가슴을 감동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발레를 하면 저분처럼 아름다워지는 걸까… 나도 저 분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은 발레를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으로 이어졌고, 열심히 발레를 배웠다. 발레를 시작하면서 나는 사뿐사뿐 구름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집에서도 내내 발레 생각만 했다. 너무 재밌고 좋았다. 완전히 발레에 빠져들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항상 발레학원으로 달려가 밤늦게까지 연습했다. 다른 또래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소꿉놀이도 하고 함께 놀러 다니기도 했지만 난 그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생각은 하나였다.

‘발레를 더 잘하기 위해선 연습을 더해야 한다’는 집념뿐이었다. 방학이 되거나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마다 도쿄 가이타니무용단 본부에 가서 발레를 배웠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발레를 배우는 시간이 더 재밌고 좋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고, 나는 발레를 얻는 대신 친구들과 한데 어울리며 느끼는 일상적인 기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발레만 알고, 발레하고만 놀았던 나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해 본 추억도 없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어 놀지도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는 제2의 재산”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재산’을 모으지 못해 후회한다.

대학 입학 후에도 친구들과 여유있게 아이쇼핑 한번 해보지 못했다. 그 당시의 내 수첩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혼자 먹었다’, ‘혼자서 무엇을 했다’ 등의 메모들이 담겨있다. 요즘 그 수첩을 볼 때마다 ‘그 나이에 어떻게 혼자서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발레 자체가 말이 필요 없는 예술인 데다 이야기할 친구가 없다보니 나의 말수는 점점 줄었다. 늘 내 자신과 대화하며 살았다. 혼자라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발레가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하실까봐 힘든 티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연습실에서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친구삼아 연습만 했다. 발레를 위해 참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발레만이 최고의 내 친구였다.

얼마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오랜만에 어릴 적 동창을 만났다. 반가웠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서로 얼굴은 익숙했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나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선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데….

결국 나에겐 발레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숙명이다. 어릴 때부터 발레는 밥이고 위안이었기에 내 삶의 원동력이 됐지만, 발레가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대신해 줄 수 없기에 가끔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