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우리 부부는 참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연극쟁이였다.
남편(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삶을 위해 꿈을 접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상 생활을 책임지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나는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다. 연극을 하면서 틈만 나면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라디오 진행도 하면서 남들의 두 배 세 배 몫을 해냈다. 남편은 남편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고 나도 주어진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한 발 한 발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온 것처럼 ‘무엇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매진하기를 요구했다. 칭찬보다는 아쉽고 고쳐야 할 점을 일러 주는 것이 올바른 사랑이며 강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크고 있다고 믿었다.
LK:연극배우 김성녀와 뮤지컬 배우 손지원 모녀 (경향신문DB)
그러나 언제나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딸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기대치를 채우지 못하는 자괴감으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또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 외국어에 능통하고 뭘 하든 잘할 수 있는 아이라고 믿었던 아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건강이 상한 것뿐 아니라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긴 방황을 거듭했기 때문다.
뒤늦게 안 아이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지켜보며 엄마로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당혹감에 기가 막혔다. 돌이켜보니 잘했다고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엄마,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엄마,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힘들다고 말할 때 극복하고 이겨내라고 다그치기만 한 엄마…. 나는 엄마가 아닌 선생님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을 부모인 우리에게 베풀고 살았던 것 같다. 공연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가면 “엄마, 너무 힘들지. 물 갖다 줄까? 이불 덮어 줄게, 엄마, 푹 자.” 아주 조그마한 손으로 이불을 꼭꼭 덮어주며 엄마처럼 나를 다독거려 주던 아이들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보살핌과 따뜻한 위로를 아이들에게 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고 그 칭찬과 위로를 아이들이 엄마인 나에게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어 했는지도 나는 몰랐다. 아파하고 고민하는 일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줬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그저 엄마로서 아주 열심히 살았고 내가 자라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으로 넉넉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도와줄 수 있다는 것으로 엄마 역할을 다 했다고 큰소리치던 못난 엄마였다.
아이들이 아프면서 난 참 많은 것을 깨달았고 선생님이 아닌 엄마가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동안 서툰 부모 밑에서 우리 아이들이 참 마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라도 꼭 필요한 부모 노릇이 무엇인지 더 늦지 않게 깨닫게 되어서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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