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자 후회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갔을 때이다.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용배의 우정은 각별했다.
용배는 락, 포크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좋아하는 색깔까지 나와 같았고, 사상과 철학도 비슷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싫어도 용배가 좋다고 하면 그 일을 할 정도로 우리는 바늘과 실 같은 사이였다.
오랜 시간 사물놀이를 계획하며 속내를 털어놓던 친구가 사물놀이패를 나가겠다고 했던 날, 나는 광분했다. 2년 동안의 사물놀이 공연 일정이 정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 친구는 이미 국립국악원으로 출근해 첫 봉급을 받았다고 했다. 다른 멤버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다.
사물놀이 원년 멤버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왼쪽부터) l 출처 :경향DB
“손 내놔. 가면 손가락을 다 자를 테니까 알아서 해.” 험한 소리를 하며 그의 마음을 바꾸려고 다섯 달을 매달렸다. “내가 너한테 준 거 다 두고 가라.”
음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 최고의 상대였고 서로 좋은 기운을 받아 새로움을 탄생시켰다. 나는 그에게 보낼 수 없는 간곡함을 그렇게까지 표현했다. 가정을 꾸리고 있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혼자 살고 있던 용배는 한 마디로 내 말을 잘랐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그와의 마지막 연주였던 1984년 4월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공연을 기억한다. 우리는 막이 오르기 10분 전까지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던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용배가 국립국악원에서 꾸린 팀은 남사당 시절 나와 경쟁자였던 장구의 명인 전수덕, 양도일 선생님의 제자 박은하 등 모두 내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사물놀이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연주곡목을 그곳으로 가서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당시 언론은 그 일을 두고 “사물놀이 분가”라고 표현했다. 그를 잃은 것은 안타까웠지만 충분히 새로운 뭔가를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86년 5월, 도쿄의 세다가야 미술관 개관 기념공연을 앞두고 용배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날 첫 문을 여는 비나리는 구슬프다 못해 애잔했다. 생전의 용배 얼굴이 객석에 앉아 나를 보는 듯했다. 떠나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무대를 장식했다. 사물놀이를 시작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나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동반자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2006년 4월23일 죽은 용배와 함께 사물놀이를 탄생시킨 공간사랑에서 나의 영원한 음악적 동반자 용배의 20주기추모공연 ‘먼저 간 친구를 그리며’를 하게 됐다. 용배를 그리워하는 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사물놀이를 창단했던 멤버들이 다 모였다. 그곳에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면서 공연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나의 친구 김용배. 나는 그와 함께 땀 흘리고 웃으며 공연했던 이곳에서 용배가 우리를 떠날 때 남사당 정신에 의해 자유롭게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점,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겼던 오해를 풀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낸 것에 대해서 한없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2012년, 지금도 용배와의 추억이 담긴 곳들을 지나가게 되면 그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를 배려하지 못한 내 자신이 후회된다.
'=====지난 칼럼===== >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 김성녀 - 옳은 말만 하는 엄마 (0) | 2012.03.25 |
---|---|
(41) 서정진 - 구조조정 악역 (0) | 2012.03.01 |
(39) 이이화 - 끝내 못 쓴 역사소설 (0) | 2012.01.25 |
(38) 박석무 -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역리 (0) | 2012.01.24 |
(37) 장사익 - 떠돌이 장남 (0) | 201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