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37) 장사익 - 떠돌이 장남

(37) 장사익 - 떠돌이 장남
장사익 | 소리꾼

 

‘산설고 물설고 / 낯도 선 땅에 / 아버지 모셔드리고 / 떠나온 날 밤 // 얘야, 문 열어라 //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 잠긴 문 열어제치니 / 찬바람 온몸을 때려 / 뜬눈으로 날을 샌 후 // 얘야, 문 열어라 //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허형만 시인의 ‘아버지’
라는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누군가 내 뒷목을 후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강렬한 느낌을 담아 이 시를 꼭 노래로 부르고 싶었다. 수천번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곡을 붙여 태어난 노래가 ‘아버지’다.

경향신문 DB



한평생 게으르게 살아온 나에게 후회되는 일을 묻는다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중의 으뜸은 아무래도 ‘불효’다. 10여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평생 집안의 장남인 내가 변변한 직업조차 없이 떠돌면서 사는 걸 늘 안쓰러워하셨다.

“무슨 일이든 제발 3년을 넘겨봐라. 이 애비의 소원이다. 뭐든 진득하게 해야 성과를 낼 수 있는 거다.”

내 고향인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신 아버지는 소문난 장구잡이셨다. 내가 소리꾼이 된 건 순전히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은 덕분이다. 그러나 소리꾼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무려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카센터 직원, 무역회사 영업사원, 전자회사 영업사원, 노점상,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등 나도 다 기억하기 힘든 직업을 전전했으니 시골에 계신 아버지로서는 늘 마뜩잖으셨으리라.

40대 중반이 돼서야 첫 앨범을 내고 소리꾼이 됐으니 아버지로서는 평생 변변치 못한 자식 때문에 마음을 끓이셔야 했다. 오죽하면 “제발 3년 만…”을 강조하셨을까. 늦깎이로 소리꾼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늘 사는 일에 서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속에 늘 노래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든 손에 잡히지 않아서 온갖 직업을 전전한 듯하다.
당연한 결과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변변한 효도 한번 못했다. 당신들에게 넉넉하게 용돈을 드려보지도 못했고, 따뜻한 옷 한벌 사드려보지도 못했다. 대신 늘 걱정거리만 잔뜩 안겨드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뒤늦게 소리꾼으로 인정받은 아들을 보고 세상과 작별하셨다. 드디어 한 가지 일을 3년 이상 하는 아들을 보신 셈이다. 지금도 무대에서 ‘아버지’를 열창하고 나면 금세라도 아버지가 “얘야, 문 열어라” 하면서 대기실로 들어오실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제발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못다 한 효도를 다하고 싶다.

또 다른 후회는 예전에 냈던 내 앨범을 들을 때다. 왜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불렀을까? 왜 좀 더 잘 부르지 못했을까? 이런 노래를 세상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내놨다니? 뭐 그런 한심한 후회가 몰려온다. 일상에서의 후회는 ‘늘 조금만 먹자’는 나와의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밥욕심’을 부려 잔뜩 먹어놓고는 후회한다. 다 사람이 모질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어쩌랴. 태생이 그러하니 후회하지 않고 살긴 틀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