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34) 김성훈 - 선거 출마

김성훈 | 중앙대 명예교수


흔히 사람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완력의 세기에 따라 우두머리가 결정되는 동물의 세계와는 달리 권모와 술수, 재능과 경륜, 재력에 의해 대표가 뽑히는 민주사회일수록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은 범부들도 기회만 있으면 우두머리 자리를 탐낸다. 그래서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민주주의가 두루 환영받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 범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도 불현듯 젊은 시절의 순간적인 야망을 연민과 회한의 정으로 뒤돌아볼 때가 있다. ‘착한 원순씨’가 서울특별시 시장으로 극적으로 뽑히던 날, 나의 성공인 양 마냥 기뻐하다가 문득 지난 날의 어리석었던 행동을 후회하는 상념에 빠졌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던 1995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정치와는 무관한, 평범한 교수였던 나더러 고향 땅의 도지사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것도 민주화 투쟁의 화신인 큰 어른으로부터 내려온 권유였다. 지금의 공천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고 덥썩 물어 안을 만큼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학문활동과 시민운동, 농민운동만 해오던 나에게 그 제안은 받아들이기도 뿌리치기도 곤혹스러운 난제였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돈도, 경험도, 조직도, 준비도 안 된 주제였다. 그런데도 시민운동 동료들은 지방자치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며 내 등을 다독거렸다.
망설임 끝에 직접 큰 어른을 뵈었다. 위 네 가지 말고도 정치할 마음도 없노라며 사양을 했다. 한참 경청하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 논문 한편을 꺼냈다. 그리고 “이거 김 교수의 글이 맞소?” 자세히 보니 두어달 전에 ‘광주·전남 경제 이렇게 살리자!’라는 세미나에서 발표한 나의 논문이었다. 빨간색 푸른색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었다. 그렇다는 나의 대답에, 그러니까 이 논문에서 주장한 대로 한번 실천해 보라며 힘주어 권하신다.

그렇게 해서 야당후보 등록 마지막 날 어마지두에 도지사 후보경선에 뛰어들었다. 꼭 열흘간 19개 시·군을 미처 다 돌지도 못한 채 투표일을 맞았다. 자초지종을 생략하고, 단 두명이 후보로 나선 경선에서 30표차로 낙선하였다. 문자 그대로 선거(정치)가 무엇인지조차 몰랐고 준비를 갖추지 않은 예정된 실패였다. 그 지역 도민들의 여론이나 참여가 전혀 배제된, 그러나 당시로는 매우 참신한 대의원들만의 민주적 경선에서 탈락한 것이다.

혈혈단신 몸뚱어리만 갖고 선거판에 뛰어들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정치놀음이었다. 정치판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그 세계가 어떤 세상인지 가늠조차 못했던 나는 단 열흘간의 경선 기간 중 갖가지 흑색선전과 모략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투표 직전의 마지막 경선 연설에서까지 된통 얻어터진 것이 하도 억울해서 나는 단상에 나란히 앉은 상대 후보에게 낮은 소리로 왜 정견은 발표하지 않고 사실도 아닌 거짓말로 공격만 하시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한참을 쏘아 보더니 “여보 김 교수, 축구시합에서 볼(공)만 차는 줄 아십니까. 심판이 안 볼 때 적당히 까고 치기도 하지 않소?” 만고에 불변할 우문에 현답이었다.

볼도 제대로 차지 못하는 주제에 하물며 까고 치기를 잘 해야 하는 선거판에 실탄도, 얻어터질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끼어들다니. 물론 아날로그 시대의 정치와 지금의 사이버 시대 정치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입지(立志)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주제에 무엇에 뽑혀서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욕이며 무모한 것이다.
그래서 그후 두세차례 (정치) 선거판에 삼고초려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나는 단호히 물리쳤다. 인생에서 똑같은 후회는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정치, 선거, 투표란 이제까지의 내 모든 삶과 행동방식을 통속적으로 온통 바꾸어 정치화해야 성공할까 말까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제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온 인생을 모조리 정치화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힘든 변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