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31) 이정우 - 조기 취학

이정우 | 경북대 교수


내 인생에 후회되는 한 가지를 쓰려고 되돌아보니 후회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열 가지, 스무 가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중 한 가지만 써보려 한다. 어릴 때는 밖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의병놀이, 소타기, 말타기로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런데 골목에서 놀던 애들이 하나둘 입학하고 나니 같이 놀 아이들이 없어졌다. 골목이 썰렁해지면서 심심하기 짝이 없게 됐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 부모님을 졸랐다. 그래서 취학연령이 안됐는데 한 해 일찍 입학했다. 지금 같은 대명천지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이 어수룩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초등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그 학교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입학시험이 있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입학한 기쁨은 잠시,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형편이 돼 버렸다. 내 짝이 백일해에 걸려 기침을 콜록콜록하더니 나도 감염되고 말았다. 연달아 홍역, 늑막염까지 걸려 요양으로 꼬박 1년을 보냈다.
어른 팔뚝만한 주사기를 옆구리에 푹 찔러 늑막에 고인 물을 뽑아내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부모님은 저 녀석이 살아나서 제대로 인간이 되겠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투병 끝에 살아났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1년간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므로 나의 실력은 완전 깡통이었다. ‘가나다…’도 못 썼고 덧셈, 뺄셈도 할 줄 몰랐다. 지금도 엄청난 악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차피 한 해 일찍 입학한 것이니 그냥 1학년부터 다니면 본전이었을 텐데 무슨 배짱인지 2학년으로 올라갔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산수 계산은 실수투성이였고, 자연과목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그래서 나중에 문과를 선택했지 싶다. 성적은 60명 중에서 60등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도 계속 허약체질이었다. 아파서 밥을 못 먹는 때가 많았다. 보온밥통 같은 게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가 죽을 끓여 와서 학교 나무 그늘 밑에 기다리고 계시다가 점심시간이면 몇 숟갈 먹이고는 도로 싸가지고 가시는 일도 많았다. 워낙 몸이 약한 탓인지 부모님은 내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일절 하시지 않았다. 학교에서 겨우 따라갔는데, 다행히 매년 성적이 조금씩 올라 6학년 때 반에서 10등 정도 했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할 때 대구에서 제일 좋다는 경북중학교를 못 가고 그 다음 정도 되는 사대부중을 갔다. 여전히 허약체질이라 초등, 중학교 9년간 결석을 밥 먹듯 했고,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개근상을 타는 기쁨을 맛보았다.

몇 년 전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이 나를 일종의 지진아로 기억하고 있던데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정도로 나는 존재감이 없었다. 나에게는 우등생 친구가 없었고, 주로 공부 못하고 가난한 애들과 사귀었다. 사대부중을 다닐 때는 3년간 등하교 시에 경북중 앞을 지나가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항상 비주류였다.

어릴 때 비주류적 경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경세제민’이란 말에 매료되어 경제학을 택하게 됐고, 경제학 중에서도 소득분배론을 전공하게 됐고, 참여정부에서 일할 때는 보수언론으로부터 분배주의자, 심지어 좌파로 몰리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던 게 사실인 것 같다.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나의 불운한 초등학교 시절이 바탕이 됐으므로 학교에 일찍 들어간 일은 나에게 많은 후회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인생의 좋은 등불이 된 게 아닌가 한다.

어릴 때 우리 앞집 판자 담장에 누군가 새겨놓았던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사람이 살다 보면 불운이 행운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행운이 불운이 되기도 하니 모름지기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