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29) 조유전 - ‘발굴’ 이라는 업보

조유전 | 고고학자


후회라?

원고청탁을 받고서 일생을 살면서 ‘내가 과연 후회했던 일이 무엇인가’를 반추해보았다. 글쎄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을 살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던가. 그것이 짧은 인생의 길이든, 긴 인생의 길이든 관계없다. 생을 마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뿌려지거나 아니면 땅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지 않나.

사람은 사람일 뿐 신이 될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화내면서, 그리고 때로는 즐겁게 살아간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어쩌면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면서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했던 일을 반성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후회도 한다. 이것 역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하기야 후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뜻에서 필자는 평생을 후회로 점철된 일에 종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고고학자로서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곧 ‘발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난 반세기 동안 몸담아 온 고고학적 유적발굴조사는 나를 평생 후회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 고고학은 옛 조상들이 남긴 흔적과 유물을 땅속이든 물속이든 발굴을 통해 이를 찾아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복원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발굴조사가 필수적이다. 남겨진 흔적을 찾고 유물을 찾는 발굴조사를 한다는 것은 곧 유적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고고학은 발굴이고 발굴은 파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이란 이름 아래 유적 파괴에 몸담아 오고 있기 때문에 결국 유적 파괴가 평생의 업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후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누누이 강조해왔듯 1971년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끝낸 무령왕릉 발굴조사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후회의 기억이다. 세상에, 지금 같으면 몇 년을 두고 세심하게 발굴해서 역사를 복원해야 할 일인데…. 그것을 하룻밤 사이에 뚝딱 해치우다니…. 물론 당시 ‘졸병 조사단원’이라 발굴의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임에 틀림없다.

또 하나, 가장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파주시 서곡리 군사보호구역 내에 있는 한 무덤이 도굴범에 의해 파괴되면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의 특별한 조사 지시로 1991년 4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발굴 전 무덤 앞에는 주인공을 알리는 청주 한씨의 묘비가 있었다. 그 묘비에 따라 한씨의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 있었는데도 도굴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발굴 조사 결과 문제가 생겼다. 무덤의 주인공이 묘비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땅 밑에서 묘지석(墓誌石)이 새로 출토됐다. 묘지석은 무덤 주인의 공적과 출생과 성장 등에 관한 모든 사항을 돌에 새겨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발굴된 묘지석에 새겨진 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묘지석은 이 무덤이 한씨가 아닌 안동 권씨의 행적을 새겨넣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묘는 한씨 묘가 아니라 권씨의 묘였던 것이다. 원래 서있던 한씨의 비석은 훗날 누군가 잘못 세운 것이었음을 웅변해주었다.

무덤 주인이 바뀌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래의 주인을 찾았으니 잘된 일이 아니냐는 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무덤을 자기 선조의 것으로 알고 수백년간 모셔온 집안 입장에서 보면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대로 조상의 무덤으로 여기고 모셔왔는데…. 결국 이 문제는 대법원까지 가는 송사로 번졌다. 그 결과 무덤은 새 주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가 생긴다. 본 주인을 찾아줬다고 마냥 좋아할 일인가.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그때 만약 발굴하지 않았다면…. 수백년간 묘를 정성스레 모셔온 집안이 앞으로도 영영토록 모셨을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