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27) 정민 - 영어 공부

정민 | 한양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럿거스 대학에 방문학자로 갔다. 집이 프린스턴시에 있었기 때문에 근처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에서 작업을 주로 했다. 한번은 세미나 공고가 붙었다. 제목이 ‘털난 야만인’이었다. 19세기 일본 회화에 갑자기 많이 등장한 털북숭이 야만인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미국 내 다른 대학에서 온 중년의 백인 교수는 그림 자료를 띄워가며 호들갑스럽게 발표했다.


그림 속의 털난 야만인은 누가 봐도 매부리코를 한 서양인이었다. 그가 갑자기 군관 복장을 한 수염 많은 조선 통신사 그림을 잇달아 보여주더니, 일본 회화 속의 야만인의 정체는 서양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단정짓듯 말했다. 분기가 탱천했다. 저런 미친 자가 있나? 하지만 한마디도 못했다.
다행히 그의 주장은 발표 당시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 대학 미국인 교수들에게 박살이 났다. 분이 조금 풀렸다. 한국인이 야만인이라고 모욕하는데 정작 당사자가 꿀먹은 벙어리로 있다 온 것만큼은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때 유창한 영어로 그의 터무니없는 논의를 통쾌하게 꾸짖어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상쾌했을까?

그간 학회 참석차 외국에 다닐 기회가 꽤 있었다. 견문도 넓히고 그들의 사고방식도 익힐 겸해서 힘들어도 참석했다. 번역을 염두에 두고 발표문을 쓰려니 문장도 마음에 안 들고, 시간과 비용도 적잖이 들었다. 그래도 다녀오면 생각이 깊어지고 무엇보다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접근 방식이 우리와는 판이했다. 아! 질문을 저렇게 바꾸니까 답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나도 그렇게 해봐야지. 질문을 바꾸자 놀랍게도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지점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입도 뻥끗 못하는 반벙어리 수준의 내 영어 실력이 지금도 늘 답답하다. 도움을 받아 번역해간 원고를 떠듬떠듬 읽다 보면 주어진 시간은 금세 다 지나간다. 질문을 못 알아들어 늘 쩔쩔 맨다. 막상 외국 학자들의 한국학 관련 발표는 읽어보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다. 파워포인트 자료를 띄워가며 현란하게 발표해서 무슨 굉장한 내용인가 싶어 들여다봐도 사실은 참 한심한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라면 같이 발표하는 게 창피할 정도였다. 그들도 내 형편없는 영어 실력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중국어는 좀 달랐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대학 3학년 방학 때 중국어 회화 학원에 등록을 했다. 겨우내 짧은 단문의 회화를 반복해서 익혔다.
하루는 인사동의 중국책을 취급하는 서점에 들렀다. 홍콩에서 책을 가져온 젊은 친구가 중국어로 떠드는데 주인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서툰 중국어로 중국사람이냐고 묻자, 답답하던 그가 내가 중국어를 잘하는 줄 알고 신이 나서 막 떠들었다. 말이 통할 리 없었다. 한자로 필담을 섞어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다.

고작 한두 달 배워 필담 섞어 중국인과 대화를 했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그 뒤 상황을 만들어 중국인과 대화하는 상상이 부쩍 잦아졌다. 4학년에 진학하면서는 그때 막 생긴 중문과 2학년 교실에 들어가 3과목이나 정식으로 수강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중국 논문을 열심히 읽었다. 당시 한국 한문학 연구의 일반적 연구태도와는 방법이 달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98년에는 교환교수로 대만에 1년 가 있었다. 중국어를 전혀 몰랐다면 용기를 내기 힘들었을 일이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이 늘 후회스럽다. 밖에 나가 보면 언어가 권력이란 말을 실감한다. 한국학의 세계적 경쟁력은 언어의 장벽에서 자주 가로막힌다.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콘텐츠가 없고, 콘텐츠의 경쟁력을 갖춘 반벙어리들은 입을 못 떼니 그저 한몫으로 넘어갈 밖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외국어 하나쯤은 원어민 수준으로 익히고 싶다. 그 바탕 위에서 학문의 경쟁력을 갖출 때 신나는 멋진 일들이 좀 많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영어 공부를 시작해볼까? 내년 세 번째 안식년을 앞두고 이런저런 궁리가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