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24) 조수미 - 가족과 함께 못한 시간들

조수미 |성악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무대는 1986년 6월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있는 베르디 극장이었다. 오페라 <리골렛토>에 등장하는 청순가련하고 헌신적인 소녀 질다 역이었다.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게오르그 숄티, 주빈 메타, 로린 마젤, 제임스 레바인과 같은 마에스트로들과 함께 공연했다.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 런던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같은 세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올랐다.

국내외에서 30여종의 음반을 내고 지금까지도 한 해의 대부분을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데 쓸 정도로 바쁘다. 지난 25년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앞만 바라보며 치열하고 도전적인 과정을 걸어온 듯 하다. 기교적이고 화려한 음색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오페라 무대의 화려한 프리 마돈나로서의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감수해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투명한 프리즘을 통과한 오색찬란한 무지개 빛과 같이 그런 후회스러웠던 것들도 내가 걸어온 삶의 일부이다.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모니터링하던 중 초등학교 시절 온 가족이 손을 잡고 창경궁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자료화면으로 나간 것을 보았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리 다섯 식구의 모습을 보며 만 20세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가족의 생일도, 기념일에도 멀리에서 전화통화나 우편으로 축하해줄 수밖에 없어 남동생들의 결혼도, 조카의 탄생도 모두 함께하지 못했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2006년 4월 갑작스럽게 작고하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점이다.

가족들은 “청중과의 약속이다. 공연을 마쳐야 한다”며 귀국을 만류했다.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계획을 바꿔 공연을 강행했다. 노래를 부르는지 의식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 간신히 공연을 마쳤다. 이후 서울에 돌아와 아버지께 달려갔지만 죄송함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어머니님도 연로하셔서 기억이 많이 흐려지고 몸도 많이 쇠약해졌다. 1년에 몇 차례 한국을 찾을 때마다 뵙는, 짧은 시간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한 가정의 장녀로서, 누나로서 가족들에게 힘이 되기보다는 되레 가족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당연히 가족들을 가까이서 돌보고, 의지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음악 외엔 많은 부분을 신경쓰지 못했던 것 같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들과 같은 많은 예술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더라면 지금의 내 음악세계는 더욱 풍성했으리라 생각한다.
25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깨달은 바로는 그러한 예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같은 방향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세상을 화필로, 문필로, 음표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곧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기에 조금 더 어린 나이부터 그런 시각을 넓혀왔으면 더욱 풍부하고 아름다운 감성으로 노래했으리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트였을 때 내 눈에는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많은 존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포화와 화염에 휩싸인 분쟁을 통해, 우매한 어른들의 학대를 통해 폭력이라는 것을 먼저 접하게 되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가진 능력과 사랑으로 그들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결심이 더욱 굳건해졌다.

조금 더 일찍 그런 시야가 트였더라면 더 많은 어린아이와 여성들,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할 많은 존재들을 도울 수 있었으리라.

내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바로 음악이다. 나의 음악으로 병들고 상처받은 많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야를 틔워주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확고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