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22) 손숙 - 스물한 살의 결혼

손숙 | 전 환경부 장관·연극인

나는 21살 대학교 3학년 때 결혼했다. 오직 사랑 하나만 붙들고 우리 엄마의 엄청난 반대에도 꿋꿋하게 맞섰다. 그냥 내 눈앞에 보이는 그 남자 한 사람만 보고서 참 용감하고(?) 무모한 결혼을 감행했다. 그때의 내겐 미래가 암담했었고 아무런 확신도 없었으며 집안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는 소식조차 없었고 무조건 자식들은 서울가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무모한 상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엄청 힘들었고 그 때문에 식구들은 모두 서로를 증오하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마침 만난 남자랑 사랑에 빠진 터라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곳도 낙원은 아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나의 힘들고 허전한 부분을 모두 채워주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한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바람이었는지를 금방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은 그 남자도 엄청 힘들고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아내가 자신의 의지가 되리라 믿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엄청나게 힘든 경제적 문제가 우리의 사랑따위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결혼은 꿈이 아니었다. 혹독한 현실이었으며 그 현실을 이겨 나갈 아무런 준비없이 나는 덜컥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남편도 나도 참 힘들었다.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현모양처를 꿈꾸었는데 현실은 나를 자주 악처로 만들었다. 백마 탄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때때로 내 자존심은 바닥이 났고 친정에 가서도 나는 늘 고개숙인 딸이었다.

생각해보니 21살 그때 정말 이루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었는데….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만 밤새워서 하고 싶다.

늘 나의 꿈이었던 글도 다시 치열하게 써 보고 싶다. 신춘문예에도 응모해보고 동서양 고전들, 철학책, 역사책도 눈이 아프도록 읽고, 외국어도 두어개쯤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그리고 배낭 메고 훌쩍 여행도 떠나보고, 남학생들하고 미팅도 해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때 대학도 졸업하고….(아주 나중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음) 그 시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나이에 덜컥 결혼이라니….

나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바람에 아름다운 시절을 놓쳐버린 것 같아서 늘 가슴속에 그것이 후회로 남아있다.

결혼은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다음, 그 나이에 할 일들을 어느 정도 이룬 다음,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말고(그 남자는 그냥 가슴속에 남겨두고), 친구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남자 만나서 인생을 걸 만큼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그런데 또 만일 내가 그때 그 남자랑 결혼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그것도 평생 내 가슴속에 후회로 남아있었을 것 같다.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인생(人生)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늘 가보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하지만 막상 그 길을 갔을 땐 또 다른 후회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엔 내가 그때 결혼을 해서 좋았던 일들을 생각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점도 쏠쏠히 많았던 것 같다. 한때는 엄청나게 후회했던 결혼도 이제는 꿈같고 그저 무덤덤할 뿐…. 그렇게 내 인생은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