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많은 팬이 기억하듯 미국 현지시간으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일본의 결승전이 열렸다. 그리고 또 많은 팬이 기억하듯 연장 10회초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중요한 순간 복잡한 결정을 해야 했다. 양상문 코치를 통해 임창용-강민호 배터리에게 ‘거르라’는 사인을 냈다. 이치로와 승부하기 직전 양 코치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메이저리그 구장은 한국과 달리 더그아웃 안에 감독의 의자가 있는 게 아니라 낮은 철망이 있어서 거기에 기대 경기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양 코치에게 “사인 전달하고, 선수들이 받았나”라고 물었다. 양 코치가 “확실히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게 내 잘못이었다. 야구에서 타자를 걸러 보내는 사인은 두 가지다. 아예 포수를 일으켜 세워서 고의 4구를 통해 내보내는 것과 포수가 일어서지 않은 채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으면서 걸러 보내는 것이 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감독의 선택은 복잡하다. 아주 미묘한 상황이었다. 다음 타자는 나카지마였다. 고의4구가 나오게 되면 다음 타자의 집중력이 높아진다. 나카지마는 이날 경기에서 안타를 2개나 때렸다. 괜히 집중력을 높여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포수를 일으켜 세우지 않은 채 이치로를 거르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아예 고의4구를 지시했어야 했다. 이치로는 볼카운트 2-2에서 임창용으로부터 중전 적시타를 뽑았다. 임창용으로서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공을 던졌겠지만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임창용 스스로가 속으로 ‘승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것까지 내가 계산했어야 했다.
이보다 앞선 9회초 한국은 2-3으로 뒤지고 있었다. 9회초 선두타자는 이치로였다. 왼손타자이므로 8회 등판한 류현진을 더 가져가야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양 코치가 “임창용의 의욕이 대단하다”는 말을 전했다. 야구에서 중요한 것은 기록만이 아니다. 의욕과 열정 또한 승부의 세계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임창용을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임창용은 이치로에게 2루타를 허용했다. 물론 1사 뒤 아오키를 상대해 고의4구 등으로 9회초를 실점하지 않고 넘겼다. 9회말 이범호의 극적인 동점 적시타가 터지면서 승부의 흐름이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 상태였다. 앞타석에서 이치로는 임창용에게 2루타를 빼앗았다. 다음 타자의 집중력 향상을 막기보다는 앞선 타석에서의 2루타를 먼저 계산했어야 했다. 임창용은 9회 등판 때 이치로와의 승부에 의욕을 보인 상태였다. 그것까지 고려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
아직도 후회가 남는다. 그때 나는 소극적인 ‘거르기’ 사인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고의4구를 지시했어야 했다. 그때 고의4구는 오히려 공격적인 사인이 될 수 있었다.
야구는 복잡한 종목이다.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미묘한 선택의 순간이 무수히 벌어진다. 게다가 WBC 결승전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날의 그 선택 하나가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준우승도 잘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감독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런 내게 ‘국민 감독’이라는 대접은 과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도 여러 가지 선택의 순간이 온다. 그때, 미래에 대한 성급한 기대를 계산하기보다는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는 결정이 나을 수 있다.
매번 부딪히는 선택의 순간, 한번쯤 숨을 고르고 과거의 경험을 반추해 본다면 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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